햇순, 공동체성서연구

 

 


3/2008

 

 

 

 

 

 

 

 

 

 

 

 

  현장의 소리

 

은혜의 카포레트

 

  말씀과 세상(5)

 

 

 

 

 

 

 

 

 





하태영

목사,
삼일교회.
htyyoung@hanmail.net






 


제사 종교 시대에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를 ‘카포레트(화해의 덮개)’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카포레트를 떠나서 하나님을 뵈올 수도, 하나님과 화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함에도 카포레트에 대한 접근은 엄격히 제한되었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 번 백성을 대리해서 성소에 들어가 카포레트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카포레트는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지성소이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요구하는 상징이지만, 동시에 사람들을 엄격히 구별하는 장벽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율법시대로 접어들면서 제사 대신 율법이 카포레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율법을 떠나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인정받을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도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정결함과 불결함의 차별은 가혹했습니다.

시대가 흘러 복음시대를 맞이합니다. 복음의 사도인 바울은 “(예수를) 화목 제물로 세우셨다”고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화해의 카포레트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여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롬3:21-22) 라고. 바울은 율법주의가 완고하게 붙들고 있는 두 기둥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율법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이고, 이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는 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세웠습니다. 이제는 피의 제사도 아니고, 율법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곧, 은혜로서 카포레트의 요구를 만족시키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의 행태와 세리의 행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심의 실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눅 18:9-14). 바리새인의 관심은 오직 자신이 세리와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지독한 차별의식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카포레트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리는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나님의 자비만을 구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에 내 맡기는 세리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복음이 세상에 가져다준 가장 큰 선물은 모든 사람을 ‘은혜의 카포레트’ 앞에 세운 것입니다. 인간은 너-나 없이 죄 아래 있습니다. 동시에 은혜 아래 있습니다. 인간은 그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자신의 죄인 됨을 드러낼 수 있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높은 자도 없고, 낮은 자도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율법주의는 여전히 위력을 발휘합니다. 전에 유대인들이 율법이라는 무기로 차별을 견고하게 했다면, 오늘날은 경쟁의 논리로, 기득권의 논리로, 역사의 주역이라는 논리로 차별을 고착시키고 있습니다. 세상은 율법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율법의 속성인 차별의 고착화에 대해서는 둔감합니다. 교회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스스로를 카포레트로 여기는 오만이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문제들의 저변에는 이제까지 기득권을 누려왔던 이들과, 새롭게 부상한 기득권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제로 썸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이 틈바귀에서 고단한 이들은 견고한 ‘조직’으로부터 소외된 비정규직이요, 서민들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누리면서 자기들이 마치 새로운 역사의 카포레트나 되는 것처럼 행세하는 이들이 공동체의 번영을 위해 헌신한다는 것 자체가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차별, 독점, 기득권이야말로 개혁되고 척결되어야 할 율법주의의 전형입니다.

인간은 은혜의 카포레트 앞에 세워진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기득권도 정당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잠시 권력을 손에 쥐었다 해서 새로운 역사의 주역으로 여기는 것이야말로 스스로를 카포레트로 여기는 독선입니다.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하십니다. ‘기득권’은 현실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 미래를 좀먹으며 가난한 이들에게 눈물 젖은 빵을 먹게 합니다. 가진 것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서 공동체의 번영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득권자가 되려는 유혹을 떨쳐버려야 진취적인 미래를 향해 자신을 개방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은혜의 카포레트 앞에 세우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농업현장의 소리

 

2008년은 <지구의 해>

 

 

 

 

 

 

-자연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이숭리

권사,
생명의 쌀나눔 기독교운동 본부위원.
lsr47@hanmail.netail.net






 


가을걷이가 끝난 어느날, 지리산 높은, 산청마을에서 지짐지지는 냄새가 진동한다. 마을 잔치가 벌어진 거다. 올해 이 마을이 유기농사를 훌륭히 잘 지어서 나라에서 상금을 받았단다. 상을 받은 농민들은 이것이 농사 잘 지은 우리가 받은 상일뿐만 아니라 형제자매가 되어 함께 소비해준 YWCA 생활협동조합의 상이기도 하다고 전국각지에서 이 조합 식구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조합원들은 사방에서 버스를 대절해 타고 700여명이 좁은 산청마을에 몰려들었다. 산 중턱 잔치마당까지는 버스가 올라갈 수 없어 트럭에 사람을 나누어 실어 나르고 또 날랐다. 이 많은 사람을 마을마다 각자 음식을 해서 한 50명씩 나누어서 대접을 하고 도시와 농촌이 함께 하는 기쁨을 나누고 친교를 다지느라 하루 종일 시끌벅적했다.

오후에는 Y이사들과 생명밥상 이야기로 세미나를 하고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서 버스를 탔다. 일찍 찾아오는 겨울밤으로 사방이 캄캄한데 버스 창밖으로 설치미술을 해 놓은 것같이 밭 가운데 비닐하우스가 커다란 등처럼 불빛으로 환하다. 그 광경은 산청에서 진주를 가는 길가에 계속 이어졌다. “아저씨 저게 뭔가요?” 기사 아저씨께 물었다. “아 깻잎이요?” “왜 밤에 불을 저렇게 훤하게 켜놓나요?” “깻잎 연하라구 그러지요. 사람들이 뻣뻣한 깻잎 싫어하잖아요”

너무도 당연한 듯 말한다. 비닐하우스가 계절을 당겨 사계절을 없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낮밤을 없앨 수 있다는 미처 못 했었다. 순간 24시간 환하게 닭장 불을 켜 놓아 알을 하루에도 몇알씩 낳게 한다는 양계장이 떠올랐다. 이제는 깻잎도 잠을 재우지 않아 연약하게 만들어 버리는구나-(그 후로 TV에서 딸기도 잠을 재우지 않아야 빨리 크고 연하다며 자랑하는 것을 보았다). - 잠을 자지 못하면 씨를 맺지 못하게 된다. 불임 또는 거세와 같은 현상이 벌어져서 잎과 열매가 연하면서 커지게 되는 것이다. 잠 못 이룬 채소, 동물, 사람, 세상 … 혹시 잠 못 자서 미쳐버린(?) 채소…. 맥이 탁 풀렸다.

오후 내내 밥상을 준비하고 먹으면서 생명밥상의 수칙10가지를 지키자고 한 말이 자꾸 떠올라서 말이다. 첫 번째로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전하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두 번째로 “신음하는 피조물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세 번째로 “자연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듣는다”등등.

우리는 작년 태안 기름유출 사고로 아주 우울하지만 의미있는 올 새해를 맞게 되었다. 게다가 2008년은 UN이 정한 <지구의 해>이다. 엄청난 태안 환경오염 처리를 위해 초교파적으로 기독교 환경 봉사단이 구성되었다. 기름 오염 후 뒤처리를 위한 봉사만이 아니라 생명보다 맘몬을 섬기며 금전적인 이익을 위해 창조질서를 훼손하고 서서히 오염시킨 지구를 회복하는 선한 청지기가 되기 위해 더듬이를 바짝 들어 올려야 하지 않을까? 이 시대의 믿음이 무엇일까? 자연의 신음소리를 들을 줄 아는 것이리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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