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순, 공동체성서연구

 

 


8/2004

 

 

 

 

 

 

 

 

 

 

 

 

영혼의 논리와 언어

 

영혼의 종교(The Soul's Religion) (6)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책

토마스 무어 지음










 


이 논의에서 내가 안전이나 불안 같은 단어들을 쓰고 있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지식에 대한 우리의 문제는 대체로 정서적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틀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과학지식의 세속적 형태는 미스테리와 신비주의를 괄호 속에 묶어 놓은 채 우리를 흔들리는 터전 위에 남겨 두었다. 우리의 지성의 일부만 개입하는데, 그 일부란 사실과 측정치를 붙들고 씨름한다. 그 접근법은 불완전하기에 우리가 걱정하게 만드는데, 그 까닭은 직관적으로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이 더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신비감이나, 심지어 니콜라스의 신성한 무지에 대한 관념은 우리의 지성을 궁굴려 준다. 알지 못함도 지성의 일부가 될 것으로서, 수많은 종교들이 영구히 가르쳐 온 관념이다.

영성적 지식에 대한 니콜라스의 접근법은 두 부분이 있다. 신성한 무지와 이미지에 대한 호소가 그것이다. 일단 사실들이 심오한 판타지와 이미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일별하고 나면, 세계라는 그림을 살피게 되는데 그 그림 속에는 사실들이 자리 매김 되어 있다. 조셒 캠벨이 한 말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데,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늘 신화를 살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부정적인 뜻이 아니라 세계가 어떤 것이며 삶이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한 심오하고 또 삶을 형성하는 상상력이란 뜻으로 하는 말이다. 이런 상상력은 사실과 경험에 의하여 지지 받을 수도 있고, 다른 종류의 지성과 일치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우리의 관념을 문자 그대로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망상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어둠의 피라밋이 모든 신앙적 표현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렇다고 부정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심리치료사로서 내가 항상 염려하는 때는 내담자가 자기 삶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하여 산뜻하게 설명할 때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잘 이해하지는 못하면서도 진행되고 있는 과정을 신뢰하는 모습을 보면, 성숙의 수준을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다. 불안의 수준이 현저하게 내려간다. 확실성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자유하면, 우리는 삶을 형성하는 미스테리를 자유롭게 탐험할 수 있다.

이미지와 시적 표현은 신앙이라고 하는 무지와 지식의 배합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특별히 효과적이다. 스토리가 기쁨을 주는 까닭은 모든 세부 사항이 정확해야 한다든가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든가 하는데 대한 염려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성찰을 공고히 하기보다는 오히려 풀 수 없는 문제를 고찰하고 심화시키도록 해 준다. 이미지는 결론보다는 오히려 경이로움을 키워준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견해보다는 지혜를 이루어준다.

시적인 표현은 늘 그 중심에 빈 구멍이 있어서, 비평가들은 시나 그림이나 음악이 무엇에 대한 것인가를 할 수 있는 만큼 전문적으로 설명함으로써 그 빈 구멍을 메우려 애쓴다. 그러나 그들은 물론 실패한다 - 우리는 늘 분별력이 있는 비평가를 찾지만 말이다 - 그 까닭은 예술의 본질상 빈 중심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내재적인 비움을 갖는 것이 종교와 공통인데, 그런 이유로 해서 예술은 영성생활에 필수적이다.

거룩한 무지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한계에 대하여 고백하게 만든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작으로 유명한 작가의 생애 끝에 가서 말하기를 자신의 저작은 모두 지푸라기 같은 것이었고, 다만 무지와 비움에 대한 좋은 이미지일 뿐이라 하였다. 아름다움과 재기와 표현의 독창성에 있어서 누구도 견줄 수 없었던 에머슨은 생의 끝자락에 다가서면서 언어에 대한 능력을 잃었다.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을 알았으나(적합한) 단어를 찾지 못하였다. 자기 의식이 절묘한 사람이었던 그는 자신의 환경으로부터 단절되었다. 그의 전기 작가들은 그가 켐브리지로 롱펠로우의 장례식에 갔던 이야기를 전한다. 그는 둘러보면서 물었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죠? 이건 무슨 집인가요? 잠자는 이는 누구죠?” 비움이 그의 생애를 점차 끝내 주면서 임종을 준비시키는 적합한 질병의 형태로 그에게 찾아온 것이었다. 우아함과 해학을 지니고 그는 꾸준히 빛의 피라밋에서 어둠의 피리밋으로 옮겨갔다. 그는 공책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모든 일은 마법을 동반한다. 사실이 평이하게 보이고, 완전히 알게 된 듯이 보인다면, 그것에 대하여 그대가 아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1)

사람들은 흔히 자신들의 정서적 불안이 잘못 자란 데서 기인한다고 생각하고, 자기들의 불안을 심리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불안정은 또한 잘못 믿는 데서 기인하기도 한다. 모든 사람에게 목숨을 걸 만한 생활 철학과 종교적 입장이 필요하다. 지성을 충족시키거나 정직하게 감동을 주는 종교적 상상은 우리에게 자신감과 안정감을 안겨 준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신비가 허용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불안은 상상력이 약한 데서 나온다. 이해심의 끝자락에서 용감하게 사는 대신에,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모든 질문에 답을 주는 신앙 체계를 꽉 잡고 늘어지는 사람이 많이 있다. 이런 대답은 신경의 핵을 에워싸는 방호책이 된다. 그러나 환상적인 구조물은 가짜 확실성을 창출한다. 미스테리에 대한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그것은 엄청난 주장이나 독선적 자세로 해석되어 나타난다.

내가 서술하고 있는 종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보면 실제로 교회에서 보는 종교와 반대되는데, 미스테리의 현존 안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설적이며 위로하는 길을 제시하여 준다. 이런 종교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설명할 필요 없이 자연과 삶에 연결시켜 주는 의식을 행하는 법이다. 이런 종교는 강력한 복합적인 이미지와 아울러 인식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을 관상하는 데 필요한 고대의 테크닉을 제공하여 준다. 이런 종교는 미스테리를 편하게 받아들이게 해 주고, 온전한 지식을 가지고 인생을 심오하게 살면서도 환상에 빠지지 않게 도움을 준다.

쿠사의 니콜라스가 저술한 글은 아주 오래 되었고, 심오하며 난해하고, 둘둘 말려있는 것 같으나 내 종교적 탐구에 있어서는 일차적인 뒷받침이 되었다. 그는 나에게 불확실성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 결과로 나의 경이는 증가하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나는 종교적 물음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고 싶어 하였다. 나는 예수가 과거는 어떤 분이었고 또 현재는 어떤 분인가를 알고 싶었다. 나는 사물의 본질에 있어서 붓다의 역할이 무엇이었으며, 마호메트가 영감을 받아 창조하려던 것이 무엇이었나를 알고 싶었다. 나는 죽은 다음에 무슨 일이 생길지 그리고 세상의 모든 비극과 갈등이 궁극적으로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물음에 대한 집착은 별로 느끼지 않는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걱정거리가 되는 문제를 어느 정도 무시하는 자유를 느낀다. 나는 모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나는 사후생에 대하여 어떤 견해를 가져야 할 필요도 없다. 나의 작은 가슴에 다 담을 수 없는 너무 복잡한 어떤 도덕적 물음에 대해서는 심지어 양가적일 수도 있다. 나의 무지는 달리 얻지 못할 경험이나 경이에 닿을 수 있는 티켓이 된다. 그렇다. 때로는 그것 때문에 열등감을 느낄 수도 있으나, 그 느낌 역시 위로가 되기도 한다. 긴박감을 누그러뜨리기도 하고, 나를 에워싸며 느껴지는 것이 바로 모든 것을 알고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본적인 무지를 인정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안정감을 제공하여 준다. 내가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하여 많이 알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나는 나의 정직성 안에서 편안할 수 있다. 내가 더 많은 것을 아는 체 하면 우월감을 느낄 수는 있으나 그 댓가는 깊은 불안이다. 나의 불확실성 덕분에, 나는 자신의 무지 안에서 웃을 수 있고, 나는 하찮은 노력 속에 깃든 희극성을 즐긴다. 삶에 대한 아이로니컬한 신뢰는 앎과 알지 못함 사이에 놓인 문간의 한 지점에서 존재하게 된다. 무지를 없애고 나면, 우리가 계속해 나가게 만들고 믿음과 우리를 건강하게 유지시킬 유모가 들어설 자리가 없어진다.

중심적인 역설은 물론, 니콜라스가 교육받은 무지라고 일컫는 데 도달하는 데는 상당한 지식과 깊은 생각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자신이 알지 못함에 대하여 편해 질 수 있는 시점에 도달할 때까지는 우리 스스로 배워야 한다. 그리고 교육은 결코 멈추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늘 환상의 잔재가 남아있고,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가를 아는 감각이 있어서, 그것이 불타올라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Ⅱ부 미스테리

비움에 대한 교훈을 배웠다면, 이제 우리는 영성과 종교적 생활의 실체인 미스테리에 가까이 다가설 준비가 된 것이다. 미스테리는 단순히 미지의 세계에 대한 커다란 응어리 같은 것이 아니다. 판타지와 의미로 가득한 특수한 미스테리가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이를테면, 죽음, 사랑, 질병, 섹스, 공격성, 아름다움, 실패 그리고 욕망 같은 것이다. 세월을 두고 세계의 종교들은 의식을 만들어냈고 이러저러한 미스테리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를 전하였다. 그런 의식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 속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것과 따져볼 겨를 없이 그것에 따라서 통과제의를 거치게 했다.

미스테리에 대하여 증명하든가 논박하는 일, 그리고 거기에 있는 신비성을 몰아내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대안으로는 미스테리가 어떻게 우리 삶의 바로 중심에 놓여 있으며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만들어 주는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것을 관상할 수 있고, 그런 것이 어떻게 우리의 나날의 삶에 영향을 주고, 의식이나 이야기를 통하여 삶에 대한 상상을 엮어 가는가를 보는 것이다. 이런 미스테리에 대하여 우리를 헌신하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된다. 그것은 일체의 명제에 대한 순전히 지성적인 동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삶에 방향성과 가치를 부여하는 전적으로 개입적인 방식을 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 깊이 묻힌 믿음의 씨앗을 가지고 태어난다. 해를 거듭하면서 수많은 다른 외적인 형태를 거친다. 그러나 그것은 깊이 개인적이며 의식적으로 선택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수호천사, 곧 헤라클리토스는 우리의 캐릭터라 하였고 워즈워드는 별이라고 그렸던 현존의 안내자와 동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예배하러 모인 천 명의 사람 가운데 있는 각자는 그 집단의 신조나 철학으로는 온전히 표현될 수 없는 특정 신앙을 지니고 있다. 믿는다는 것은 우리를 형성하는 것의 일부인 그 씨앗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도록 부름 받은 그 존재로 우리를 성숙시킬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세계에 이바지하는 데 필요한 안정감을 줄 것이며, 자신감 있는 사회의 구성이 되는 신뢰를 안겨 줄 것이며, 영혼을 지닌 인격이 되도록 끝없는 깊이를 더해 줄 것이다. 우리의 나이브한 첫 믿음과 그것이 발전하여 삶의 기본적 신뢰가 되는 것과 의심이나 문제와 씨름하는 어른들의 몸부림,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영성생활의 부분들로서 꾸준히 그리고 전심전력으로 대면해야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런 종류의 믿음이 삶의 의미라는 것과 아울러 애초부터 그것이 우리를 이끌어주고 형성하면서 우리와 내내 함께 하였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느낀다.
사랑이 내려와 자기 속에 자리하였음을,
그에게 지혜가 있다면 감지할 것이다.
사랑은 주님이신 영원한 시적 천재에게서 온 것임을.


윌리엄 블레이크, “쉬든보그의 거룩한 사랑과 거룩, 지혜에 대한 주해”

4. 믿음은 곧 사랑이다.

믿음이란 사상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낱말이다. 이 낱말은 게르만 뿌리 즉 소중히 여긴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믿음은 친애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경험을 상상할 때 그 아름다움에 끌린다. 우리는 그것과 친밀해지고 거기에 대한 충실감을 느낀다. 사람들은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틀렸다거나 착각하는 것이라고 보여 주려 애쓴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깊이 밀착된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대로 인생을 사랑하고 그 귀중한 비전을 아무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의 사랑은 복잡한 것이고, 심지어 종교적 신앙도 그렇다. 홀림이나 필요한 의존은 그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한다. 사랑은 늘 모험이다. 영성지도자는 나타나서 설득력과 호소력을 가지고 세계관을 제시한다. 머리로는 조심스러울지라도 마음은 응답한다. 교리와 교훈에 대한 온갖 이야기로 말하자면, 종교나 영성체계에 집착하는 것은 늘 머리보다는 오히려 마음으로 하는 일이라 할 것이다.

내 자신의 신앙을 성찰할 때, 내가 정서적으로는 카톨릭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애착을 유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원초적인 정서는, 필경 모교회가 주는 위로를 바라는 영원한 어린이의 소원일 수는 있겠으나, 나의 어른으로서의 욕구를 충족시키지는 못한다. 나는 소속과 모험 양쪽을 다 원한다. 나는 영성의 고향을 원하면서 동시에 탐험을 할 필요가 있다.

처음에 나는 무의식의 카톨릭 신자였다. 수녀들과 신부들이 만든 종교를 타고 났고 그런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교회에 충성하였고, 평생을 그 일에 바칠 것을 고려하였다. 내가 1960년대 중반에 수도회를 떠났을 때, 나는 교회가 근본개혁적으로 더 좋은 쪽으로 변화할 것을 기대하였다. 나는 제 2 바티칸 공의회가 커다란 변화의 획을 그었고 새롭고 보다 더 지적인 영성에 대한 약속을 해 주었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수도원 생활을 떠난 것은 종교가 부당하거나 반동적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심오한 영성의 변화를 내가 거쳐야 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당시에 떼야르드 샤르뎅이나 폴 틸리히 같은 빼어난 신학자들의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들은 나에게 전통적 신앙을 보는 눈을 새롭게 뜨게 해 주었다. 나는 동시에 성서를 문자적으로나 나이브하게 보던 것을 더 줄일 수 있게 되었다. 그 때는 변화와 희망의 기운이 가득한 때였다. 무지의 중요성에 관하여 내가 이미 저술한 모든 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와 배움이 나에게는 영성에 이르는 주요한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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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랠프 왈도 에머슨, 주제별 노트, 1권. 수잔 서튼 스미스 편 (콜롬비아: 미주리 대학교 출판부, 1990)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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