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 가을이 깊었다. 산돌학교로 들어가는 은행나무 숲길은 온통 노란 눈으로 뒤덮인 것처럼 깨끗하고 순수하다. 차마 그 길을 밟기가 조심스럽다. 익어가는 자연은 겸허하며 성숙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우리도 이렇게 아름답게 익어갈 수 있을까? 나이 든다는 것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보여줄 수 있을까?

단풍이 절정에 이르는 산돌 늦가을은 어느 이름 난 산보다도 아름답다. 산돌관 館을 멀리서 바라보면 이런 늦가을의 풍경과 잘 어울린다. 강학당의 낡은 기와가, 그리고 황토 벽돌로 지은 교사 校舍의 붉은 빛이 가을 색과 잘 맞아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만들어 준다. 좋은 건물은 계절마다, 아니 날마다 바뀌는 빛에 따라 주변과 새롭게 조화를 이루는 건물이리라. 자연은 익을수록 더 어울리는 품이 커지는 듯하다. 그래서 가을이 깊을수록 그 안에 사는 생명들도 그 품속에 더 깊이 들어가는 것 같다.

‘영성의 길을 함께 가는 사람들’이 함께 깊어간다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일까? 반대로 함께 길을 가는 동지가 없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산돌에서 5년을 함께 보내는 산돌 친구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함께 길을 가는 친구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고 있을까? 자신들의 삶이 곧 영성의 길이라는 것을 바라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는 것이 스승들이 해야 할 일이라면, 산돌 교사인 나는 진정 스승이라 할 수 있을까? 깊어가는 가을과 더불어 내면의 소리는 더 고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물음에 대해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하는 갈증이 있다. 물음이 깊을수록 목마름은 커진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산돌의 자연은, 모든 산돌 가족들에게, 너무도 충분한 스승이 된다는 것이다. 어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이렇게 따뜻하게, 편안하게, 감동스럽게, 기쁨으로, 아름다움으로, 그리고 깊은 깨우침으로 이끌어주는 스승을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

하느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눈으로 보고 온몸으로 만나는 이 자연은 하느님 말씀 자체이리라. 가을 은행나무 아래 서서 그분의 말씀을 들어보라. 산돌 동산 안에 머물며 따뜻하고 청량한 햇살로 다가오는 그분의 손길을 느껴보라. 때때로 정신이 번쩍 나는 차가운 바람으로 불어오는 그분의 서늘한 기운을 느껴보라. 인간의 손으로 만들고 가꾸었지만 산돌관 館에 깃들인 하느님의 영과 사랑을 느껴보라. 세상 구석구석 그분의 은총이 없는 곳이 있을까? 오히려 영성가들은 사막과 빈들에서 하느님을 만났다. 아무 생명도 없을 것 같은 황량한 그곳에서조차 그들은 하느님을 뵈었다. 지금이 우리 삶의 사막과 같은 그런 시절이라면,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하느님을 뵈올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는가? 낙엽이 다 지고나면 이제 스산한 초겨울로 접어들겠지만, 우리들 가슴에 하느님은 더 따뜻한 사랑으로 다가오시길, 두 손 모아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