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을 앞두고 이 땅에 평화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전쟁이 계속되고 지구의 수많은 지역에서 갈등과 분쟁이 그치지 않는 현실에서 평화는 온 인류의 절실한 염원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정의를 세워 만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그 바른 관계들 안에서 생명의 충만함을 누리게 하시는 평화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구약성서에서 그분의 사랑을 표현하는 낱말은 연민인데, 연민을 뜻하는 히브리어 라민 rahmin은 어머니의 자궁을 뜻하는 레헴 rehem과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연민은 하나님의 여성적 측면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적대하고 멀리 떠난 사람들을 향해 연민을 가지고 그들을 용서하고 포용합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는 신실한 분입니다. 그분은 변치 않고 신실한 분이기에 사람들이 그분을 버리고 멀리 떠나게 만든 죄를 제거하고 그 사람들을 불러 그분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수립되는 정의는 하나님의 자궁에서 솟아오르는 연민과 사랑의 열매입니다. 사랑이 배제된 정의는 참된 정의일 수 없고, 폭력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폭력은 결코 평화를 수립하지 못합니다.

심판과 승리의 하나님 상은 전쟁에서 희생당하고 패배한 채 살아남은 사람에게 위로와 희망을 제공하지 못하고 그들의 고통과 소외를 가중시킵니다. 전쟁이 왜 발발했는지, 전쟁으로 인해 적과 아군으로 갈라져 싸우는 사람들이 어떤 희생을 감수했는지, 그것이 과연 의미 있는 희생이었는지를 성찰하지 않은 채, 전쟁의 승리와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동일시한다면, 누가 무고한 희생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화해와 사랑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고통과 희망을 함께 하는 누군가가 없을 때, 포기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은 쉽사리 마약과 알코올, 폭력, 불의, 또 다른 전쟁을 불러일으키려는 유혹에 흔들리고, 이번에는 승리하여 복수하겠다는 열망에 불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전쟁과 폭력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포용하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바로 이런 하나님이 정의로운 하나님임을 믿습니다.

역사적으로 여성은 남성에 비하여 전쟁에 직접, 간접으로 참여하거나 군대조직의 생활을 경험한 일이 훨씬 적고, 그 대신 대체로 출산과 양육 등 이른바 모성의 역할을 담당해 왔습니다. 이와 같은 역할분담은 자연히 그 역할의 수행에 적합한 기질과 특성을 고착시켰고, 남성-군인-씩씩함-공격성-지배능력과 여성-어머니-돌봄-포용력-관계능력이라는 도식이 가부장제 문화에서 통용되곤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남성은 전투적이고 여성은 평화적이라는 고정 관념이 형성되었는데, 이를 무비판적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성 인지적 관점에서는 반론의 여지가 많습니다. 평화친화성이 여성의 본성에서 비롯되었는가, 아니면 사회화의 산물인가를 놓고서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만, 여성이 평화를 위하여 일하고 그런 사명을 성취하는데 자신이 지닌 평화 능력을 올바로 인식하고 펼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평화롭게 살 권리는 강자나 약자 모두에게 부여된 것이지만, 약자는 강자에 비하여 현실적으로 일상적 폭력의 대응능력 측면에서 무력감을 경험하는 기회가 많고, 그렇기 때문에 평화를 교란하고 파괴하는 것에 더 민감한 감수성을 가지고 그것을 극복하는 지혜와 열정을 갖는 특권도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여성에게 요구되는 평화능력은 여성과 남성의 차별에서 비롯되는 일그러진 관계를 회복하여 여성의 인권을 실현하는 데 꼭 필요합니다. 그 능력은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수립하고, 갈등을 조정하고, 평화를 수립하는 데에도 기여할 것입니다. 여성의 평화능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온 피조물의 복지와 피조물들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생존을 향한 모든 생명체의 권리를 인정하고 그것을 보호할 때 여성의 평화능력은 그 진가를 발휘할 것입니다.

올 성탄절에는 지구의 온 땅에서 평화를 염원하고 그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기쁨이 널리 퍼지고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