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순, 공동체성서연구

 

 


05/2012

 

 

 

 

 

 

 

 

 

 

 

 

  현장의 소리

 

우리들의 이야기! 이야기!

 

  볍씨와 에니어그램(5)

 

 

 

 

 

 

 

 

 





조순애

광명YMCA볍씨학교
my-lord__jesus@hanmail.net






 


볍씨 청소년 과정 7-8학년 아이들은 3월 초에 시작여행을 다녀옵니다. 한 아이의 표현에 따르면, 이 여행은 ‘시작을 여는 오프닝 공연 같은 것’입니다. 올해는 무의도라는 작은 섬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썰물 때가 되니 바닷길이 열려 우리는 지척에 있는 실미도로 걸어 들어가 굴을 따 먹기도 하고, 산 위에 올라 해님빛 되비추는 바다를 한참 내려다보기도 했습니다. ‘다방구’, ‘쥐와 고양이’ 같은 마당놀이를 하며 땀내며 뛰어 놀기도 하고, 앞으로 진행될 배움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요. 이렇게 낮이 지나고 해가 저물고 저녁이 됐습니다. 이젠 시작여행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시작할 차례입니다. 이 시간엔 내가 현재 어떤 문제에 걸려있는지 확인하고 올해 중심에 두고 힘쓸 일을 찾아나가기로 했습니다. 아이들이 이 시간을 준비하며 발제해온 글 중 일부를 옮겨 봅니다.

OO: 매일같이 누구와 비교를 해서 ‘잘 한다’, ‘못 한다’를 따진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다. 나는 기준이 가면 갈수록 높아진다. 풀씨 때나 저학년 때에는 기준이 높지 않았다. 그 때는 인정도 잘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기준이 너무 높아졌다. 나는 언제나 내가 짱이어야 되고 최고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기준치를 낮추지 않을 것 같다. 나는 누군가가 나보다 잘 하면 그 애보다 잘 할 때까지 기준을 높이고, 그 아이보다 잘 하면 다른 상대를 또 만들어서 기준을 높이는 그런 종류의 사람인 것 같다.

◇◇: 내가 적극적으로 나섰다가 틀렸을 경우에 따라오는 나 스스로의 창피함이 싫었다. 나는 틀리는 것이 싫다. 이건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특히 남들 앞에서 하는 실패의 두려움이 큰 것 같다. 남들 앞에서 한 실수는 계속 머릿속에 남아서 더 짜증난다. 적극적이지 못한 것과 비슷하게 감정 표현을 숨기는 것도 일종의 이미지 관리 같다.

□□: 나는 왜 친구관계에 집착할까? 외로워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친구 관계에 집중을 하게 되고 더 즐겁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친구를 고르게 된다. 그러다 보면 그게 친구들 줄 세우기, 질투심으로도 가게 된다.

△△: 힘 있는 사람을 따라가지 않고 나를 어떻게 따라갈 건가. 저번에 □□가 나 자신의 중심과 지조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그 말이 맞는 말인 것 같다. 나 자신의 의견에 대해서 생각하기보다 바로 바로 인정해버려서 내 중심이 없다. 이젠 내 의견을 확실히 하고 지킬 줄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한 사람씩 자기 이야기를 꺼내면, 그 아이를 중심으로 20-30분 정도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는 시간들이 이어졌습니다. 발제를 듣고 궁금한 걸 물어보기도 하고, 자기 생각이나 경험을 덧붙이기도 하고, 생각의 방향을 전환시키기 위한 질문도 하고. 모두 이야기의 깊이를 한층 더 하기 위한 작업들.

여행을 마칠 무렵, 열한 명의 아이들은 자기 자신을 위한 프로젝트 주제를 하나씩 정했습니다. 나를 변화시키고 세워나가기 위한 프로젝트 제목들은 이렇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프로젝트, 나는 누구일까 프로젝트, 나를 따라가자 프로젝트, 책임감 갖기 프로젝트, 당당해지기 프로젝트, 자존감 높이기 프로젝트, 욕구 찾기 프로젝트, 독립 & 편견 없애기 프로젝트, 나 자신을 성장시키기 프로젝트,……

이 아이들은 에니어그램 수련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좀 더 또렷하게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5월 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6학년 때 에니어그램을 한번 접한 아이들이 많지만, 청소년 과정에 들어와서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자기에 대해 질문하고 답해야 하는 순간들이 부쩍 늘어 그런 듯싶습니다. 이번 여행 중에도 “저는 지난번에 7번 유형으로 나왔는데 아닌 것 같아요. 제가 몇 번일까요?” 하며 궁금해 하는 아이도 있고, 에니어그램 유형들에 대해 설명해 달라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가 갖고 있는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어서 좀 더 에너지 넘치는 생활을 하기를 바라며, 저 또한 5월 말을 기다려봅니다.

 

 

 

 

 

 

 

 

 





 

  현장의 소리

 

침묵과 고통

 

  성서연대 (5)

 

 

 

 

 

 

 

 

 





김 종 우

목사
서탄교회
kjw2125@hanmail.net






 


완연한 봄날이다. 주 예수를 섬기는 이들의 얼굴에도 옷에도 옅은 초록빛이 들었다. 비록 일주일에 한번이지만, 공동체 성서 모임이 은근히 기다려지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아닐까? 이번 주(3월 28일)에도 변함없이 생명살림교회에서 목사님 일곱 분이 모여, 기도, 찬송, 마가복음 15장을 나눈 후, 주님의 뜻을 곰곰이 되새긴다.

세상은 시끄럽다. 소리가 소리를 부른다. 빼앗는 소리, 빼앗기지 않으려는 소리, 빼앗기는 소리… 기회와 장소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소리친다. 예수 그리스도는 침묵한다. 빌라도; “당신은 아무 답변도 하지 않소? 사람들이 얼마나 여러 가지로 당신을 고발하는지 보시오.” 예수: “···” 왜 그리스도는 침묵했는가? 마가가 전하는 침묵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미 가야할 길이 있는 사람이 소음에 응답하거나 민감해야 필요가 있는가?

김종우: 사람의 길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소음 속에서도 한결같이, 힘차게, 정숙하게 가야 하는 길이다. 그 길은 의의 길이요 고통스러운 길이며, 바로 예수가 간 길이다. 다른 한 길은 소음에 묻혀 우왕좌왕하며 자신의 안위를 따르는 길이다. 이 길은 쉬운 길이요, 빌라도가 간 길이다. 한때 어느 길을 가야할까 하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물론 지금도 고민하지만 그 시절보다는 못한 것 같다.(모두 웃음)

우철영: 나는 주님의 침묵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우려스럽다. 빌라도는 판단해야 할 자리에 있다. 그렇지만 다른 복음서의 병행 구절을 보면, 그는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자신은 빠져나오는 태도를 분명히 보인다. 이런 교활한 형태의 침묵이 우리 교계와 정치판에서도 나타난다. 자기 입장에 손해가 될 때, 또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정의를 비껴가는 행태는 빌라도의 침묵이기도 하며 나의 침묵이기도 하다. 나는 소음의 반대를 화음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화음을 만들어가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함께 더불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려, 발을 내 밀고, 서로 도우며 가는 화음은 침묵만큼 소중하다.

김기섭: 김종우 목사님께서 예수의 길과 빌라도의 길을 비교할 때 괴로웠다. 아마도 내 주위에 붙잡아야 할 많은 것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종종 억지로라도 구레네 시몬처럼 십자가를 지는 것이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장진순: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다는 것은 겁나는 일이다. 예수님조차 십자가를 끝까지 질 수 없었기 때문에, 시몬이 대신 졌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완전히 지겠다는 생각은 오만이고 자만이다. 예수님을 위해 시몬을 보냈듯이, 우리가 넘어질 때 다른 이나 새 힘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지 않으시겠나?

김종우: 종종 목회가 힘들 때가 있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버티면 힘이 생긴다. 하나님은 변화와 창조의 하나님이다. 우리가 넘어질 때, 하나님은 본능적으로 우리에게 용기 주시고, 새 힘을 주신다고 믿는다.

윤병선: 예수님의 침묵에서 성화의 과정을 살필 수도 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책 중에『죽음; 성장의 마지막 단계』라는 책이 있다. 책의 제목이 참 의미심장하다. 사람의 죽음이라는 고통을 수없이 경험한 후, 그녀가 내린 결론으로 생각한다. 돈 때문에 큰 고통을 당하던 때가 있었다. 그 때 침묵 속에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는데, 비움의 새로운 경지를 맛보았다.

장진순: 기독교 전통에 아포파시스(침묵)로 수덕 修德을 쌓는 전통이 있다. 긍정의 언어나 부정의 언어나 모두 인간의 언어는 한계를 가지기 때문에, 언어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때, 침묵을 통해 케노시스(비움)에 이른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고통에 처하면, 원망의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침묵이 성숙을 불러오는 경우가 많다.

김명신: 지난 번 햇순에 민영진 박사님께서 “모형의존론적 세계관”에 관해서 말했다. 이 말은 쉽게 말하면 자기 그릇만큼 세상을 깨닫는다는 의미로 되풀이할 수 있다. 아포파시스(침묵)는 그 그릇을 깨뜨리는 훌륭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성인들이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침묵으로 자신의 그릇을 깨뜨렸다. 그들은 이러한 행위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안개를 거두어들였다. 예수님께서도 상황적으로는 멀리 계신 하나님을 침묵으로 받아들이지만, 동시에 그 침묵이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확고히 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고 생각한다.

모두 말을 마치고, 공동 기도로 순서를 끝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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