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 2020

 

 

 

 

 

 

 

 

 

 

 

 

  오늘을 바라보며

 

근대 한글 발전과 기독교, 상생 관계

 

 

 

 

 

 

 

 

 

 

 





김 슬 옹


세종국어문화원장,
≪한글교양≫, ≪한글혁명≫ 저자
tomulto@daum.net






 


1. 천주교/기독교와 한글의 만남

세종대왕은 한글을 1446년에 한자 외 또 하나의 공식문자로 선언했으나 한자의 제 1 주류 문자로서의 굳건한 자리는 바뀌지 않았다. 아무리 쉽고 과학적인 우수한 문자가 나왔어도 한자의 견고한 자리는 양반들의 기득권과 맞물려 무너지지 않았다. 446년이 지난 1894년에 와서야 고종 임금이 한글을 제 1 주류 문자로 선언하였지만 조선말까지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이런 흐름 속에서 근대 한글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기독교였다. 18세기 후반부터 한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대중포교에 성공한 종교가 천주교와 기독교였기 때문이다.

먼저 영향을 끼친 것은 천주교였다. 1779년 무렵 천주교인들 사이에 정약전의 <십계명가>, 이벽의 <텬쥬공경가>, 김원성의 <경세가> 등의 한글 천주가사가 퍼져나갔다. 가사는 운문의 성격과 산문의 성격을 함께 지녀 조선 후기에 널리 퍼진 문학 양식이라 천주가사도 더욱 널리 퍼질 수 있었다. 내용 또한 전통 고유 풍속과 결합 되어 천주 교리를 쉽게 전달해 주어 더욱 널리 퍼질 수 있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정약종은 1801년 순교당하기 전인 1790년대 말에 <주교요지 主敎要旨>라는 한글교리서를 우리나라 최초로 저술하였다.

이렇게 자생적인 종교 수용이 이루어진 천주교와는 달리 개신교 곧 기독교는 적극적인 성서 번역을 통해 한글 발전에 기여하였다. 최초의 번역서가 나온 것은 천주교의 <주교요지>가 나온 지 80여 년이 지난, 임오군란이 일어난 해인 1882년(고종 19년)이다. 로스 Ross, J. 목사와 매킨타이어 MacIntyre, J. 목사가 백홍준, 김진기, 서상륜 등의 도움을 받아 만주에서 제일 먼저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 <예수셩교셩셔요안?복음젼셔>등이 간행되어 한글전용 성경 번역서가 간행되었다.

이로부터 4년 뒤인 1886년, 육영공원이라는 근대식 신식 학교가 세워지고 헐버트는 24세의 나이로 이 학교 교사로 와서 1891년에 <사민필지>라는 한글전용 인문 지리 교과서를 펴낸다. 이로부터 3년 뒤, 주교요지가 나온 지 104년, <누가복음> 한글 번역이 나온 지 12년만에 고종은 한글이 한자보다 더 중요한 공식문자라고 선언하게 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때는 이미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시기였다. 지배층은 여성들 중심으로 써 온 한글전용체를 받아들이지 않고 주로 국한문 혼용체로 시대적 타협을 꾀했다.

지배층에 대한 저항 의식이 담긴 한글 전용 소설 <홍길동전>이 나온 것이 17세기(정확한 연도 모름)였지만 결국 지배층은 한자를 통한 지식과 정보 독점 권력을 내려 놓지 못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한글만쓰기는 여성과 피지배층의 저항의식이 담긴 문체로 자리잡게 되었고 천주교와 기독교는 이런 한글전용 문체로 만인 평등의 이념과 결부되어 더욱 널리 퍼져 나갔다.

곧 기독교 교리는 신분 사회의 불평등을 타파하는 평등의식을 심어주는데 매우 큰 역할을 하였고 그런 교리의 힘으로 하층민을 파고들었다. 더 나아가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지배층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조선왕조의 기독교에 대한 혹독한 탄압은 기독교가 반봉건의 역사적 가치가 있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해 준 사건으로 함석헌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1974)에서 이런 점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올 때 한국을 건지기 위하여 맡은 과제는 셋이었다. 첫째는 계급주의를 깨뜨리는 일이요, 둘째는 사대사상을 쓸어버리는 일이요, 셋째는 숙명론의 미신을 없애는 일이었다. 이것은 우리나라 예로부터 있었던 종교와 불교가 민족을 이끌어가는 참 정신적 등뼈나 심장이 되지 못하고, 한갓 잘못되는 역사의 소용돌이 밑에서 얽혀 돌아가는 동안 생긴 썩어져 가라앉은 사상의 앙금이다. 지독한 변태심리의 당파 싸움이란 결국 이것의 결과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정신적 고질을 고침 없이는 새 역사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을 고치기 위하여 천지에 처음으로 섬길 이는 영이신 하나님 하나밖에 없다 하며, 모든 인류는 다 형제라 하며, 사랑을 강조하고, 절대 순종의 믿음을 주장하는 엄격한 도덕적인 종교인 기독교가 오게 된 것이다.-369~370쪽

계급주의와 사대사상 타파야말로 반봉건 정신의 핵심이었고 이러한 기독교 정신은 한글과 결합하면서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다.

2. 한글 발전의 실질 효과

근대 언어의식은 누구나 언어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언어의식으로 언문일치와 같은 평등 지향의 언어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이다.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1946)에서 “국어와 국문의 발달입니다. 기독교 선교사가 경전 번역과 책자 작성을 위해 조선 어법 및 조선 문체를 연구하여 예부터 향언 鄕言, 언문 諺文이라고 경시되던 국어와 국문에 새로운 생명과 가치를 갖게 된 것은 진실로 우리 문화에 대한 큰 공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 전래 후에 종교서적 번역 외에 사전 편찬이 수 차 실행되고 신교가 들어온 뒤에는 성서완역과 찬송가 번역 등을 위하여 어문 語文의 쓰임이 더 커지는 동시에 조선어의 문법연구가 그네들의 손으로 큰 진보를 이루는 등 조선 어문에 대한 기독교 선교사들의 공적은 진실로 영원한 감사를 받을 것입니다.”라고 하여 기독교가 비주류 언문에 새로운 생명과 가치를 불어 넣어 준 것으로 평가하였다.

1892년 장로교선교공의회에서는 네비어스 선교 정책의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 “모든 문서활동에 있어서 한자의 구속을 벗어나서 순한글을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라고 규정하여 기독교 문서의 ‘한글 전용’ 원칙을 확립하고 한글전용 성서 발행에 힘을 실었다.

한글 성경이 언문일치에 기여한 바는 크게 두 가지로 첫째는 한글전용 그 자체가 기여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띄어쓰기 문체의 확산에 기여했다. 공식적인 언론에서는 독립신문(1896)이 처음으로 띄어쓰기를 하였는데 성경은 이보다 더 앞선 실천한 것이다.

3. 마무리

근대가 시작되는 시기에 만난 기독교와 한글은 적극적 상생 관계 속에서 서로 발전하였다. 기독교와 한글이 서로 결합하여 새로운 시대의 물꼬를 트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기독교 전파가 식민지 개척이라는 제국주의 역사와 맞물려 돌아가기는 했으나 신분간의 평등과 하나님의 형제 자매로서의 소중한 권리에 대한 믿음은 종교의 정치적 배경보다는 종교의 자연스런 속성의 의미를 더욱 살리게 되었고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저항과 맞물려 더욱 조선의 근대 발전에 기여하였다.

필자의 <조선시대의 훈민정음 발달사> (역락) 8장(409-430쪽)의 핵심을 다시 풀어 쓴 글.



 

 

 

 

 

 

 

 

 




08349 서울 구로구 개봉로 11길 66. 2층   Tel 010)9585-3766, 010)7591-4233
  cbsi@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