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캐롤과 연말 분위기가 고조를 이루고 있던 어느 날, 먼저 간 언니를 따라 뉴질랜드행 비행기를 탔다. 아이들 단기 언어 연수를 핑계로 그렇게 도착한, 그 나라 사람들은 모두가 더운 크리스마스 휴가 중이었다. 아이들이 도착하여 넓은 학교운동장, 끝없는 잔디에서 뒹굴며 놀더니 이곳에서 살며 공부하고 싶단다.

나는 한국에서 봉사하던 단체에 전해야 할 사항도 몇 가지 있던 차에 우체국을 묻고 또 물어서 갔다. 12월 말의 뉴질랜드는 대부분 여행을 떠나고 도시 전체가 마비가 된 듯 한산함이 감돌았다. 우체국 안에는 연말이라 대기자들이 적지 않았다. 기다려서 가져 간 내용물을 부친 뒤, 업무를 담당하던 할머니 직원에게 염치없게 정육점 위치를 물었다. 설명을 하시는데 내가 이해를 못하는 것을 눈치 채고는 안경 줄을 목에 걸고는 안쪽 업무 장에서 허리 높이의 문을 밀고 나오시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한국과 같이 그들이 바쁘다고 소리 칠 것만 같아서였다. 직원은 그렇게 나와서는 신호등 앞에서 멈춰서 선다. 파란 불이 되자 건너자는 것이다. 건너서는 골목을 돌아서 정육점을 가르쳐 준 다음에야 우체국으로 총총 다시 향하신다. 업무 도중 다른 일로 나가는데도 말없이 기다려 주는 손님들과 업무도중 도움을 요청하는 한 동양 여인을 기꺼이 도와주는 할머니 직원을 보면서 나는 충격을 받았다. 정말 이런 세상도 있었나? 우리 아이들이 이런 환경에서 공부를 한다면 참으로 바르게 자랄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마음도 아이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굳혀지기 시작하였다.

우체국 업무를 보는 분들이 연세가 드신 여성들이었다는 점이 또 다른 놀라움이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노인정에서 삼삼오오 모여 화투를 치시든가 점심 찬을 위해 콩나물을 다듬으실 연세들인데 목걸이, 팔찌, 그리고 서너 개의 반지들을 끼고선 줄 달린 돋보기로 꼼꼼히 일을 보신다. 후에 알았지만 뉴질랜드는 공무원 정직도가 세계 제 1위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체국 업무의 우수성 또한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어 다른 나라의 공무원들이 시찰을 오는 사례도 있다고 하였다. 그 원인은 바로 노인 인력활용에서 기인하는 꼼꼼한 업무 능력이라고 하였다. 얼핏 생각하면 다소 스피드는 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되나 반면에 실수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나도 젊은이들과 일을 할 때면 속도는 그들을 당해내지 못한다. 그러나 나이가 있기에 해낼 수 있는 점도 적지 않다. 뉴질랜드도 한국만큼이나 교육열이 높아 국민의 70%가 대학을 졸업한 학사들이라고 한다. 여성총리, 여성은행지점장, 여성대형버스운전자 등 다양한 직종에서 남성과 동등하게 활동하는 여성들의 천국이다.

우리 한국의 현실은 여성인력들이 너무 사장되고 있다고 나는 늘 생각하여 왔다. 모두 엄청난 수의 영어 단어들 외워서 대학까지 마친 학사인력이 거의가 가정에 갇혀(?)있다. 나의 친구들만 해도 너무 일을 하고 싶단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이 딱히 없어 친목모임이라던가 레저 활동으로 소일한다. 30대 초반의 해영씨도 부친의 사업체를 도와달라는 제의를 수차례 받지만 두 살배기 아들을 맘 놓고 맡길 이렇다 할 기관이 없어 주저하고 있다고 한다. IMF 이후, 여성 사회진출의 변화가 있다지만 여전히 미약하다. 여성 인력 활용이 저조한 것은 국력 손실과 비례한다고도 할 수 있다. 여성인력 활용을 위한 방안과 여성들이 자녀를 맘 놓고 맡길 수 있는 위탁시설 등, 부분적 보완이 절실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좋은 소식을 접하였다.

서울시가 지원하며 서울 YWCA가 운영하는 ‘영등포여성인력 개발센터’가 영등포에서 개관식을 한다고 김덕신 위원장이 초청장을 주셨다. 우중에 찾아간 곳은 영등포 극동방송사 건물이었다. 이 땅의 근로여성들을 위해 커피바리스타, 컴퓨터프로그래머, 요양보호사, 간병사, 요리사, 제빵사, 도배사 등 다양한 과정을 지도하며 수료 후 자격증까지 주어지고 있다. 나아가서 일자리 창출까지 이어지는 이 사역을 이미 서울YWCA가 33년 동안 해 오고 있다.

가정에서 벗어날 용기가 없는 여성들, 자녀 출산 후 일자리를 놓친 여성들의 잠재력을 개발시키며 인재를 양성하는 이와 같은 제도와 정부의 지원을 더욱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것도 이제는 우리의 몫이다.

이제 부인들이 문을 열고 나와 사회를 좀 더 가까이서 살펴본다면 처져있는 남편들의 어깨도 조금은 더 올라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