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으로 돌아가라 !
쟝-쟈크 루소의 외침이 아주 가까이에서 들리는 시대이다.

검은 기름바다 태안. 다양한 어족들의 즐비한 죽음, 날아오르지 못하는 철새들, 망연자실 삽시간에 폐허가 되어 버린 생존의 위기 앞에 10년, 20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자연으로의 회귀를 위하여 전국에서 달려온 자원봉사자들의 끊임없는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그 행렬은 총선을 향한 정치인들의 치열한 주도권 싸움과 우리 사회의 온갖 파벌행태를 초월하여 생명을 보존하려는 엄숙한 사투의 장으로 이어지는 장엄한 행렬이다.

나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물에 대한 교훈이 있다. 6.25전후 세대라면 누구나 가난의 추억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전쟁터에서 남편을 잃은 고모네 식구들과, 할머니, 삼촌, 그리고 부모님과 동생들과 함께 13식구가 단칸방에서 오글거리며 살 때이다. 법학을 공부하시고 공무원이 되신 아버지는 몸이 아주 왜소하시고 마음씨가 여리고 고우신 천상선비셨다. 그런 아버지의 어깨에 달려 있던 대가족들은 얼마나 큰 고통의 짐이셨을까. 퇴근모습이 유난히도 힘이 없어 보이시던 어느 날 저녁, 아버지는 커다란 양동이에 물을 하나 가득 담아 놓으시고는 식구들을 주위에 둘러앉히셨다. 그리고 식구들에게 물 한잔씩을 건네주시며 말씀하셨다. 사람은 물만 먹고도 보름 정도는 살 수 있으니 지금의 어려움을 잘 참고 견디면 꼭 좋은 날이 있을 것이다. 가족들의 허기진 배를 물로 채워주던 가장의 심정은 오죽했으랴! 그날 이후 우리들은 각자의 생활전선에서 그야말로 앞만 보고 달렸다. 자존심이 유달리 강하셨던 어머니는 식구들에게 곡기를 끊이지 않게 해주겠다는 일념하나로 어떤 험한 일도 견딜 수 있었다고 그때 일을 가끔 회상하신다. 나 역시도 부모님의 큰 도움 없이 의상학을 공부하며 파리-젱의 화려한 출세를 꿈꾸던 대학시절, 살림밑천인 맏딸노릇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학문에의 관심보다는 부富에 대한 열망이 더욱 간절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 버는 재주가 없다 해도 아끼는 재주만 있어도 빌어먹지는 않는다는 말씀을 가훈처럼 어린 우리들에게 되뇌어주셨다. 이렇게 몸소 모범을 보이신 어머니는 내 생활의 멘토로 자리매김하셨다. 또한 절약정신은 그 시대의 생활 정신이기도 했는데, 그 영향 때문인지 지금도 분수에 넘치는 일을 하면 도무지 심사가 편치 않다. 의, 식, 주 모든 생활의 형태가 간소하고 수수한 것이 좋다. 유행에 큰 상관도 불편도 없이 나름대로 내 멋을 만들어내며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때의 경험들 때문이다. 그 경험들은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가는 실리형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 같다.

내가 사는 한남동 지역이 지금은 복개공사가 되어 관공서, 노인복지관이 들어서는 등 번듯한 서울의 중심거리가 됐지만, 70년대 한강물의 범람으로 큰 수해를 입어 주민들은 장마철이면 또다시 물 피해를 당할까봐 걱정하던 주거지로서 선호도가 낮은 지역이었다. 악취가 나고 더러운 물이 흐르는 개천가에 미래목회원 건물이 세워졌을 때 그 감사와 감격은 모두가 하늘의 은혜였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고통을 지불해야만 하는가! 그러나 모진 고통 뒤에는 아름다운 성숙의 꽃이 피는 것. 어려웠던 시절 저마다 갖가지 사연을 가슴에 묻고 오늘을 살아내기까지 삶의 질곡들을 어찌 다 말로 하리요. 눈물로 드리는 골방기도의 안식과 빈한했던 시절 아버지가 손수 떠주셨던 맑은 물 한잔의 교훈은 내 삶이 좌초의 위기를 만날 때마다 소망의 빛이 되어 나를 지탱시켜준 귀한 정신적 유산이리라.

아무리 배가 고파도 깨끗한 물만 있으면 상한 자존심과 허기를 면하게 해주는 생명의 근원인 맑은 물! 그 물 찾아 인간띠를 이으며 오염사고를 극복하려는 봉사자들의 의지가 세계 각처에서 찾아온 외국인과 전문가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역사의 모진 풍파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위기를 계기의 기회로 받아들여온 민족의 은근과 끈기와 위대한 결속력이 개인주의적 물신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자연 사랑을 향한 한국형 ‘다듬깍기’로 새롭게 부활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