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바라보며 (2002. 5)

얘들아, 노올자!

구미정


아이들이 놀고 있다. 책가방이며 학원가방이며 신발주머니는 벌써 저만치 내동댕이쳐버렸다. 날은 점점 어스름해지는데, 집으로 돌아갈 생각조차 나지 않는 모양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큰소리로 깔깔대는 품이 영락없이 고삐 풀린 망아지다. 빌딩 숲으로 둘러싸인 삭막한 도시에서 참으로 보기 힘든 풍경인지라 나도 넋을 잃고 그들 속으로 빨려든다. 아이들은 놀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제대로 된 놀잇감을 구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용케 놀이를 찾아내서 노는 게 아이들이다. 돌멩이 하나, 나무조각 하나, 아카시아 줄기 하나, 실핀 하나... 그야말로 아이들의 놀이욕구를 자극하는 아이템은 무궁무진하다. 천지가 아이들의 놀이터인 셈이다.

놀 때 그들은 가장 아이답다. 아니, 놀 때는 모든 인간이 아이로 돌아간다. 노래하고 춤추면서 정말 ‘유치찬란하게’ 잘 노는 어른들을 보면 새삼 존경스럽다. 잘 논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내면의 ‘아이다움’이 손상되지 않은 채로 보전되어 있다는 뜻일 게다. 놀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 그래서 놀 줄 모르는 사람들, 심지어 노는 걸 죄악시하고, 경건과 근엄으로 똘똘 뭉친 ‘점잖은’(젊지 않은) 사람들이 제일 불쌍하다. 상처입고 왜곡된 아이다움은 소위 음지문화를 통해서라도 발산 통로를 찾으려고 기를 쓰는 법이다. 인간은 놀아야 산다. 그러므로 만약 한 사회가 모든 구성원에게서 놀이를 빼앗는다면, 그것만큼 잔인한 집단 살상도 없는 것이다. 놀고 싶으나 놀지 못하는 어린이들, 쉬고 싶으나 쉴 수 없는 어른들이 많은 사회일수록 건강하지 못하고 불의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유엔아동기금(UNICEF)과 국제노동기구(ILO) 보고서에 의하면, 14세미만의 어린이 가운데 무려 2억 5천만명이 일터로 내몰려 부당한 노동력 착취를 당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대부분 아시아나 아프리카, 남미, 구소련 등지의 아이들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어린이들은 일당 30센트(약400원)를 받고 하루 12시간씩 양탄자를 짠다. 스웨덴 정부가 마련한 ‘어린이 노벨상’의 첫 수상자 가운데 하나인 이크발 마시도 그 중의 하나였다. 파키스탄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 양탄자 공장에 끌려가 노예처럼 일하면서, 고생하는 아이들의 권익을 위해 싸우다가, 겨우 열두 살 나이에 살해당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주문자생산방식(OEM)으로 만들어지는 나이키, 리바이스 등 유명상표의 운동화나 청바지 등에도 그들의 피땀이 배어있다. 필리핀에서는 수출용으로 각광받는 관상용 열대어나 진주조개를 채취하기 위해 7~8살짜리 아이들이 이용되기도 한다. 산소호흡기 없이 허리에 밧줄을 묶고서 나무테로 만든 물안경을 쓰고 돌주머니를 찬 채 물 속으로 잠수하는 그들은 대개 물고기밥이 되기 일쑤다. 태국, 필리핀,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와, 브라질, 베네수엘라, 멕시코 등 중남미에서는 15살도 안된 여자아이들이 유흥업소와 안마소, 기타 섹스숍에서 어른들의 성적 노리개가 되고 있다. 1996년말 세계노동기구 통계에 의하면, 최소 1백만 명의 어린이들이 매춘시장에서 밀거래 되고 있다고 한다. 부자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에서는 1만에서 3만명에 달하는 여자어린이들이 매춘이나 포르노비디오에 이용돼 소아성애(pedophilia)에 탐닉하는 남자어른들의 기호를 충족시키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소위 예술사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어린이 누드집(일명 ‘로리콘’ 잡지)에 13세 미만 어린이까지도 이용당하는 실정이다. 부자들의 한끼 식대(60달러)에 몸이 팔리고, 가족에게 먹일 식량을 얻기 위해 UN구호요원에게까지 성을 상납해야하는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의 현실에 이르면, 그야말로 전지구적인 아동학대의 거대한 연쇄망에 숨이 막힌다. 예수님의 한탄소리가 절로 들리는 듯 하다. “아,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어른들이 ‘놀고 먹기’ 위해 아이들의 고사리손을 착취하거나, 어른들이 ‘데리고 놀기’ 위해 아이들의 영글지 않은 몸을 혹사시키는 일이 있는 한, 어디에도 평화는 없다. 성서가 증언하는 참 평화란,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 장난쳐도 물리지 않는 그런 세상이란다(사 11:8). 설사 젖먹이가 독사 굴 곁에서 놀아도 해를 입기는커녕 서로 벗이 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을 ‘샬롬’이라고 한다.

무릇 아이들은 놀면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혼자서 또는 여럿이서 놀이에 빠진 아이들은 시간과 공간 개념마저 잊어버린 채 일종의 초월경험을 하게 된다. 놀이는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이기도 하다. 창조의 완성은 ‘일’이 아니라 ‘쉼’에 있다. 하나님은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도 고된 노동보다는 즐거운 놀이처럼 자기를 표현해가며 만드셨다. 그러한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들은 종종 “나를 웃기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기도 한다. 사라처럼!

천지사방에서 뛰어나온 아이들이 저마다 얼굴에 함박꽃을 피운 채 놀고 있다. 천국이 따로 없다. 일년에 딱 하루, “어린이날”에만 있는 풍경이다(그 날조차 놀 수 없는 아이들이 많다는 건 차라리 죄악이다). 그 많은 어린이들이 평소에는 다 어디 묶여 있다가 그날에만 쏟아져 나오는지 모르겠다. 사실 “어린이날”이 따로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만큼 평소에는 그들의 삶이 팍팍하다는 뜻이다. 어린이날이 일년 중 단 하루로 끝나서는 안 된다.


* 구미정 (기독교윤리학 박사, 햇순 편집위원, 여신협 정의평화위원장, 협성대, 목원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