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정
하필이면 어린이날이었다. 우연치고는 기막힌 우연이다 싶었다. 황급히 연락을 받고 서울 적십자 병원으로 향했다. 무거운 마음만큼이나 멀고도 초조한 길이었다. 세상이 자기들 것인 양 오랜만에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싱싱한 기운들을 뿜어내는 아이들의 몸뚱아리 하나 하나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정상대로라면 8월에 태어났어야 했다. 그런데 언니네 늦둥이 딸은 그만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채 기다리지 못하고 6개월만에 세상에 나와버린 것이다. 정확히 910그램, 미숙아였다. 어른 엄지손가락 굵기의 다리를 팔랑거리며 손바닥만한 크기로 세상에 나온 아기, 숨을 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던 이 여린 생명은 그렇게 우리 곁으로 찾아 와서 여섯 달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의학 정의상, 출생시 체중이 2.5킬로그램 이하, 태중(胎中) 37주미만에 태어난 신생아를 미숙아라고 부른다.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평균 5-10퍼센트의 출생아가 미숙아로 태어난다고 한다. 미숙아는 생존능력이 약하기 때문에, 대체로 출산시 체중이 1킬로그램 이하이면 90퍼센트가 사망한다는 것이다.
30대 후반의 나이에, 초등학교 4학년 짜리 아들을 둔 언니가 둘째를 임신하고는 깊은 고민과 시름으로 밤잠조차 이루지 못하던 때가 생각난다. 시화공단에서 조그맣게 어린이집을 운영하면서, 소박한 공간일망정 자기 집도 장만해 가며 알뜰하게 살던 언니는 졸지에 IMF한파로 인해 어린이집 문을 닫게 되었고, 형부마저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생활의 곤란을 겪던 터였다. 언니의 표현을 빌면, 인생의 벼랑 끝에 몰린 위기 상황에서 덜컥 임신이 된 것을 알게 된 순간, 그것은 복음(good news)이 아니라 차라리 저주 같았다고 한다.
낙태를 위해 병원 문 앞을 서성거리기를 수 차례, 그러나 언니는, 자궁 외 임신으로 한쪽 나팔관마저 잘라낸 상태에서 어렵사리 들어선 그 생명을 차마 지울 수가 없었다. 동생을 살려달라는 아들의 간곡한 당부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생명을 인가받은 아기였다. 그런데 뭐가 그리 급해서 서둘러 세상에 나온 것일까?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과연 '축복받지 못한' 생명이란 것이 존재한다고 여겨질 때가 있다. 세상의 법과 제도의 테두리 밖에서 소위 '잘못된' 관계 사이에 놓여 있는 생명이 그러하고, 부모될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원치 않는' 임신이 된 경우가 그러하며, 어떤 치명적인 질병을 안고 태어난 경우, 혹은 영구적인 신체 장애를 입고 태어난 경우 등이 그러하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태어난 이후에도 환영받지 못하고 버려지거나 학대받거나 뒤틀리고 어긋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면 그는 분명 축복과는 거리가 먼 생명이라고 여겨질 것이다.
이러한 인간적인 관점에서 예수의 임신과 출생 사건을 보면 새삼 어머니 마리아의 위대함이 두드러지게 감지된다. 유대 사회에서 처녀가 임신한 사건은 단순한 스캔들 이상의 목숨을 건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자발적으로 응답함으로써, '가는 세대'의 인습적인 가치관을 뛰어넘어 '오는 세대'의 새로운 비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였다. 만약에 마리아에게 굳은 의지와 도전정신이 없었다면, 그가 세인(世人)들의 손가락질을 염려해 소명을 회피하는 나약하고 수동적인 여성이었다면, 그리고 친척 엘리사벳이 어려운 처지의 마리아를 지지하고 돕고 연대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예수라는 이름의 위대한 축복을 놓쳐버렸을 것이다.
미숙아들에게 올 수 있는 모든 합병증, 정말 이름도 생소한 유리질막증이나 기관지폐이형성증, 패혈증 등등을 하나하나 겪어내면서, 내 조카 솔이는 그렇게 스스로 자기 생명을 연단해 왔다. 온갖 의료적 조치와 치료로 스트레스에 시달려 몸무게가 700그램까지 내려가고, 간이 상하고, 피부가 새까맣게 타들어 가면서도 솔이는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아니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삼겹줄마냥 견고히 붙들고 계셨다.
올해를 넘기며 우리 집안에 찾아온 복 하나를 대라면 나는 주저없이 '엄지공주' 솔이를 끌어당긴다. 솔이는 산산조각날 위기에 처해 있던 언니 가정에 치유를 주러 왔다. 세상을 원망하며 좌절과 한숨에 빠져 있던 그 가정에 화해를 주러 왔다. 과연 세상의 모든 아기는 하나같이 다 하느님께로부터 온 생명이요, 따라서 거룩하며 복되다는 것을 깨우쳐 주러 왔다. '원치 않는' 생명은 있을지 몰라도 '축복받지 못한' 생명이란 있을 수 없음을 온몸으로 증언하러 온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번 성탄절은 특별히 세상의 모든 미숙아들과 그들의 부모들에게 기적같은 희망이 솟아나는 복된 날이 됐으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이 불어넣어 주시는 생명의 숨결에 의지하여 연약한 호흡을 지탱하고 있을 미숙아들에게 힘찬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 구미정 (기독교윤리학 박사, 편집위원, 협성대, 목원대 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