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정
나에게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다.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그로 인해 맛보았던 지독한 가난, 앞뒤로 무덤이 즐비한 산자락에 살면서 행여 귀신이라도 나올까봐 겁에 질려 잠 못 이루던 그 숱한 여름밤들, 초등학교 4학년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청소년기를 몽땅 외가에서 보낸 기억...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렵다. 이 기억들은 영혼의 서랍 속에 차곡차곡 들어 있다가 특정한 순간마다 튀어 오르곤 한다. 물론 그 중에는 차마 열어보기가 겁나서 아예 휴지통 속으로 구겨 넣은 기억들도 있다. 컴퓨터의 편리한 기능과 달리, 영혼은 '휴지통 비우기'가 되지 않아 여전히 '백업파일'로 남아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숱한 기억들을 잊고 싶어한다. 그것 하나하나가 엮여서 나라는 존재의 역사가 됨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기억하는 것 자체가 고문과도 같이 지독한 고통을 동반하기에, 또 때로는 현재에 비해 과거의 나는 형편없이 초라하고 부끄러워서 우리는 기억상실증 환자를 자초하게 된다.
그래서 생겨나는 문제가 소위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분명히 일어났던 일인데도 없었던 일처럼 시치미를 떼는 것, 확실히 없었던 일인데도 일어난 일처럼 부풀리고 과장해서 아예 소설을 쓰는 것, 이 모두가 거창하게 말하면 역사왜곡이다.
개인적 차원에서나 집단적 차원에서나 우리는 흔히 역사왜곡에 접한다. 당사자의 입장을 배려해서 애교로, 혹은 동정심으로 그냥 봐 줘야할 때도 있다. 하지만 집단적 차원, 국가적 차원의 역사왜곡은 순순히 넘길 일이 아니다. 특히 그것이 어떤 불순한 의도에서 이루어졌을 때, 그리고 죄책감이나 책임감이라곤 손톱만큼도 느낄 줄 모르는 가해자요 가진 자의 역사일 때 그렇다.
최근 TV에 불어닥친 사극바람의 선두에 서있는 "태조 왕건"을 보다가 새삼스레 역사왜곡의 문제를 되짚게된 장면이 있었다. 제작진은 예상치 못한 '궁예 신드롬'에 놀라서 원래 계획을 질질 끌어 궁예의 퇴출에 늑장을 부렸다고 한다. 그러더니 역시나 궁예가 죽는 장면에서도 어떻게 하면 폼나게 죽는 것으로 처리해서 시청률을 이어갈까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 "고려사"에는 궁예가 보리이삭을 훔쳐먹다 부양지역 백성들에게 (돌에 맞아?)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에도 산 속에 숨어 있다가 백성들에게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역사라는 것이 승자의 관점에서 기술되다보니, 약자인 궁예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궁예의 최후를 그토록 의연하고 장렬하게 '개작'한 것은 참으로 대담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소위 '역사드라마'라고 하면 최대한 사료에 의존하여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되, 기록이 전무한 부분에서만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해야하지 않을까?
현재 이와 같은 역사왜곡의 문제를 둘러싸고 온 아시아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중심에 일본이 있다. 탈(脫)아시아를 통해 미주나 유럽에 편입되기를 간절히 열망했던 일본이 근린국가들의 거듭된 반발과 저항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맹주를 자처하면서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며 동남 아시아 전체를 침략전쟁과 대학살의 '킬링필드'로 만들었던 일은 만천하가 다 아는 진실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4년에 한번씩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거쳐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채택하는 과정에서 번번이 침략의 역사를 해방의 역사로 '개작'하고 있는 것이다.
1982년에 일어났던 교과서 파동의 악몽을 재현하고 있는 최근의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를 보면 '갈수록 태산'인 것을 실감하게 된다. 당장 내년 1학기에 보급될 8종의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들(일본의 고교생들은 대학입시에서 일본사보다는 세계사 시험을 선호하는 추세이고, 대학에서도 일본사를 배우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일본사를 배울 기회는 중학교 시절밖에 없다), 그 가운데 특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측의 역사교과서는 이른바 황국사관으로 도배된 극우 역사왜곡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황국사관이란 무엇인가? 일본 국민이 신처럼 떠받드는 천황제 신앙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닌가? 고로 과거 일본이 저지른 모든 죄악들을 '천황무오설'로 뒤집어엎으려는 시도 아닌가? 1995년을 기점으로 '전후 50주년 총결산'을 다짐한 일본은 이제 더 이상 과거의 원죄의식에 사로잡혀 있기 싫다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풀이된다.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심의 원동력이 되었던 천황제 신앙, 동경전범재판마저도 어쩌지 못한 그 뿌리깊은 주술을 부활시킴으로써 일본 국민들을 황국신민으로 재결집시켜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거추장스러운 과거사쯤이야 간단히 걷어찰 밖에...
'새 역사교과서...모임'은 "이 교과서로 배운 학생들이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30년 뒤의 일본에 희망을 걸고 있다"고 밝혔다. 우리 눈엔 절망인 것이 그들에겐 희망이란다. 도무지 축소되고 은폐되고 삭제되고 조작된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운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과거는 왜곡한다고 해서 청산되는 게 아니다. 비하든 미화든 역사왜곡은 현재의 불건강을 폭로할 뿐이다. 과거의 잘못을 일체의 가감없이 인정하되,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책임이 뒤따를 때 비로소 과거는 치유되고 현재와 화해를 이루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다. 손끝만 살짝 대어도 유난히 아리고 쓰린 상처가 있다. 그런 상처는 덮어둔다고 해서 낫지 않는다. 오로지 바람을 쏘여주어야만 낫는다. 그러므로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역사적 진실에 직면하는 자에게 살 길이 있다. 일본은 지금 희망의 근거를 거기서 찾아야 한다. 언제까지나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는 없지 않은가?
무분별하고 무책임하게 역사왜곡을 자행한 '새 ...모임'을 비롯하여 일본 역사교과서 제작자들, 그리고 앞에서는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쉽 공동선언'(1998)을 채택해놓고 뒤로는 이 선언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린 일본 문부과학성 관계자들, 또한 한일협정에서 모든 배상은 끝났다고 오리발 내미는 일본 정부의 주장에 침묵으로 동조하는 한국 정부 관계자들에게 해줄 무서운 말이 있다: "나는 네가 지난 세월에 한 일을 알고 있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왜곡한 역사의 뒤편에서 생생히 울려퍼지는 하나님의 음성, 그리고 우리 모두의 외침이다.
* 구미정 (기독교윤리학 박사, 편집위원, 협성대, 목원대 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