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남학생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 그 두 자리를 모두 환자에게 내주었다. 고맙다는 소리는 그 친정 어머니가 하고, 환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두 자리를 모두 차지하고 누워버렸다.
앞자리의 처녀들도 이미 일어서 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자리를 권했다. 할아버지는 비좁지만 두 처녀와 함께 한 덩어리가 되어 앉고, 남학생만 서있게 됐다.
친정 어머니는 들고있던 보따리를 누워 있는 딸의 머리 밑에 받쳐 주고, 아무렇게나 뻗은 다리의 치마를 바로 여며주었다. 그러고는 그 발치께에 불편하게나마 앉을 수 있는데도, 자리를 내어 준 젊은이가 미안해선지 얼른 앉지를 못했다.
“그리루 앉으세요.”
우연히도 세 사람이 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제야 딸의 다리를 몸으로 가리며 겨우 걸터앉았다.
할아버지는 환자를 바라보았다.
‘서울로 시집 보낸 딸이 중병에 걸려 시골 친정으로 죽으러 가는구나.’
이윽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때 환자가 갑자기 눈을 뜨더니, 통로까지 들어찬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머니, 대전서 워떻게 차를 갈아탄대유?”
환자가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대답도 듣기 전에 환자는 힘없이 도로 눈을 감아 버렸다. 감은 눈에서 소리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허허, 아무리 무정한 남편이라해도 마지막 길이나마 동행을 해주었던들, 여인은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는가?’
할아버지는 자세한 속사정은 물어 볼 수 없어,
“어디까지 가시는데 그럽니까?”
하고 행선지만 물었다.
“연산까지 가느만유.”
그 친정 어머니가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그럼 호남선으로 갈아타셔야겠습니다.”
“예.”
“내가 책임지고 차를 갈아 태워 드릴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됐지요?”
“…….”
환자는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걱정 말고 어서 누우시오.”
그제야 환자는 안심이 되는 듯 스르르 눈을 감으며 의자에 누웠다.
할아버지는 그 여인에게서 이북에 두고 온 그의 딸을 보았다. 오히려 그의 딸보다 열 살은 아래일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딸이 어디로 시집을 갔는지도 모른다. 이 여인처럼 멀리 시집을 갔다가 행여 중병을 앓고있지나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사위가 그 여인의 남편처럼 병 고치기를 단념하고 할아버지의 딸을 버린 것이 눈앞에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늙은 아내가 지금 이 여인의 친정 어머니처럼 그 딸을 기차에 태워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딸은 도중에 차를 갈아 탈 걱정 때문에 눈물을 흘려 기차의 시트를 적시고 있을 게다.
할아버지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참느라고 창 밖 풍경을 내다보았다.
기차가 역에 설 때마다 내리는 사람은 없고 타는 사람만 많았다.
수원에서 남녀 학생들을 비롯하여 몇 사람이 내렸지만 역시 타는 사람이 더 많았다. 기차가 천안을 지날 때쯤 정오가 가까워지면서 열어 놓은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마저 후끈후끈했다.
드디어 대전이었다. 힘겹게 일어나 시트의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앉은 환자가 통로까지 꽉 들어찬 사람들을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부인이 이 가방을 좀 들고 뒤따라 나오시오.”
하며 손가방을 환자의 어머니에게 맡겼다. 그리고 환자에게 등을 돌려 대며 말했다.
“자, 내게 업히시오.”
“…….”
“어서 업혀요!”
“미안혀서 워치케 업힌대유. 아저씨.”
할아버지는 잠깐 허리를 펴고 환자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차 안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들을만큼 큰 소리, 그 쨍쨍 울리는 쇳소리 음성으로,
“내 말소리로 알겠지만, 나는 이북이 고향인 사람이오. 고향에 당신보다도 더 나이 많은 딸이 있소. 그 딸이 아파서 당신처럼 차에서 내릴 수 없다면, 그 곳 누군가가 나처럼 이렇게 업어서 내려 줄 게 아니오? 어서 염려 말고 내 등에 업혀요. 내 비록 칠십 노인이지만, 지금도 웬만한 젊은 사람하고 팔씨름해서 져 본 적 없는 사람이오.”
그제야 환자는 마지못한 듯 할아버지의 등에 업혔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그 말은 환자가 업히는 데만 효과를 낸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사람으로 빽빽이 찬 통로가, 저 사람들을 어떻게 뚫고 나갈까 하고 걱정이 됐던 그 통로가 일시에 어느 훌륭한 사람의 행차 길보다도 더 훤히 트여 버린 것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혹은 시렁에 매달리기도 하고, 혹은 의자 사이에 끼여들기도 하며 할아버지가 환자를 업고 나갈 길을 충분히 만들어 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