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규 연재동화 (2002. 9)

할아버지 댁의 겨울(3)



“그런 얘기를 얘들이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어요, 당신두 참.”
엄마가 아빠의 말을 막으셨다.
“그렇군. 하긴 그런데 그냥 거짓말이고 미신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 마 음 속에 소원하는 것을 빌다 보면 그만치 노력두 하게 되구, 그래서 이루어지 면 감사하고, 그러는 사이에 전쟁이 나면 사용할 돌멩이두 준비되고 이래서 좋 고 저래서 좋고 그렇게 되지.”
“알았어요. 그만하면 충분히 알았어요.”
경일이가 말했다. 경완이는 저만치 앞서 뛰어가고 있었다. 내리막길이 끝나는 곳에 다시 논밭이 펼쳐지고 건너편에 작은 마을이 보였다. 슬레이트 지붕마다 눈을 두껍게 이고 엎드려 있는 집들 사이사이 기와집도 보였다. 초가집은 없었다. 감나무 가지에도 눈이 쌓여 있었다. 그 가지 끝에서 까치가 울었다. 거기 붉은 감 두어 개가 아직도 매달려 있다.
“저게 할아버지 댁이다.”
아빠가 말씀하셨다.
언덕 아래 대숲에 싸인 커다란 기와집 굴뚝에서 흰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왜 이렇게 조용해?”
경완이가 말했다.
“시골이라 그렇지.”
엄마가 말씀하셨다.
“저 집들 사람들이 사는거야 ?”
경완이가 다시 물었다.
“그럼! 추우니까 집안에들 있지. ‘할머니!’하고 불러보렴.”
아빠가 말씀하셨다.

“할머니!”
경완이가 소리치며 달려갔다.
“할아버지!”
경일이도 소리치며 달려갔다.
감나무 가지 끝에 앉아 꼬리를 깝신거리던 까치가 푸드득 날았다.
“어이쿠, 이게 누구냐, 내 새끼덜!”
팔을 벌린 할머니가 대문간에 나타났다. 경일이가 그리고 경완이가 할머니 품에 안겼다.
“어머님, 안녕하세요?”
엄마가 할머니께 인사하셨다.
“어머님, 안녕하세요?”
아빠도 할머니께 인사하셨다.
식구들이 모두 나오고 두어 번 컹컹 짖던 누렁이도 꼬리를 흔들었다.
“어서 들어가자. 허, 이 녀석들 춥지도 않은가?”
할아버지가 기분이 좋으시다. 경일이와 경완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큰절을 했다. 아빠와 엄마도 큰절을 하고 무릎 꿇고 앉으셨다. 경일이와 경완이는 삼촌에게도 큰절을 했다. 고모에게도 큰절을 했다. 초저녁부터 안방 건넌방 사랑방까지 손님들이 가득 찼다. 부엌에서는 아주머니들이 음식을 차렸다.
“오늘밤이 증조할아버님 제사야.”
엄마가 말씀하셨다.
“얘, 서울 애들 사랑으로 내보내거라.”
할아버지가 대청에서 말씀하셨다.
“경일아, 경완아. 사랑방에 나가 보아라. 동네 어른들께 절해야 돼.”
엄마가 옷매무새를 고쳐주며 말씀하셨다. 경일이와 경완이는 사랑방으로 나갔다. 많은 노인들이 앉아 계셨다. 아빠도 거기 계셨다.
“돌아가며 인사해!” 아빠가 말씀하셨다.
“이 분은 큰댁 할아버지.”
“이 분은 황새밭 할아버지셔.”
“이 분은 역말 할아버지.”
“이 분은 고랑말 할아버지.”
“이 분은 섬말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할아버지들을 가리키며 큰절을 시키셨다.
“허 그녀석, 잘두 생겼다.”
“이놈 두상 좀 봐.”
“허, 귀도 크다.”
“이름이 뭐냐?”
“몇 살인고?”
할아버지들이 한 마디씩 하셨다.
“이젠 건넌방에 가서 아저씨들한테 인사하거라.”
아빠가 말씀하셨다. 안방에서 할머님들께, 사랑방에서 할아버지님들께, 이제 건넌방에 가서 아저씨들을 만나야 된단다. 그러고도 아래채 토방에는 신발이 쌓였다.

강 정 규 님은 동화작가로 크리스챤 신문사 부사장을 지냈고, 지금은 "시와 동화" 발행인이며 햇순 편집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