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규 연재동화 (2002. 5)

약수터 가는 길(7)



경일아.
사랑이란 말 알아?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겠지만, 사랑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사랑은 오래 참는거야. 사랑은 온유해. 사랑하면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않아. 자랑하지 않고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으며,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않게 돼. 의롭지 못한 것을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게 돼.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는거야. 그리고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는거야.

경일아.
내가 보기에 네가 사는 별나라에는 사랑이 없어. 그러니까 할아버지들이 갈 곳 없이 버려진 의자를 모아놓고 거기 앉아 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니겠어?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 의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가 막내고모 시집가는 날 들은 주례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났을 뿐이야.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했다면 용서해.

경일아.
오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과정에 대한 거야. 하나의 나무의자를 만들기까지, 한 자루의 붓을 위하여, 그리고 글씨 쓰는 데 필요한 먹과 종이에 대하여 말하고 싶어.
붓은 짐승의 털로 만들지. 염소 수염, 족제비 꼬리, 닭의 깃털, 공작새 꼬리털, 쥐 수염, 토끼털, 양털, 이리와 너구리의 털, 사슴과 말의 털, 고양이털, 노루털, 갓난아기의 머리털 등 온갖 종류의 털이 붓의 재료로 사용돼.
붓을 만드는 일은 철저한 수공업이지. 털을 고르는 데서 매는 데까지 최소한 반년은 걸려야 돼.

붓을 만드는 데는 대개 겨울털을 사용해. 요즘 많이 쓰는 염소 털의 경우, 음력 설날을 전후해서 모아야 돼. 겨울이 지난 다음 햇볕에 말려 쓸 것만 골라. 이때 일백 관의 털에서 쓸 만한 것은 겨우 서너 관에 불과해.
가려낸 털은 기름을 빼야 돼. 털 위에 쌀겨를 덮고 그 위에 종이를 댄 다음 다림질을 하거나, 쪄서 말린 다음 재로 문질러서 기름기를 빼고, 기름 뺀 털을 놓고 일일이 손으로 가려내어 털뿌리를 간추리는 거야. 털의 뿌리 쪽과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털끝을 간추려, 털끝이 붓끝이 되도록 가지런히 맞추는데, 이때 털 한 올이라도 방향이 거꾸로 되면 그 붓은 못쓰게 돼. 모든 털의 뿌리 쪽이 한쪽으로 모아지고, 모든 털의 가는 쪽 끝이 모여 붓 모양이 되면, 털의 뿌리 쪽을 인두로 지져 고정시킨 다음 묶어 매어 붓대에 끼우는거야….

그런데 경일아.
너는 볼펜으로 글씨를 쓰지 않아? 아니라구? 그렇지만 너는 연필도 자동 연필깎이로 깎지 않아? 칼을 잘 못 쓴다구? 손가락을 벤다구? 컴퓨터도 있다구? 그래, 그래. 천천히 이야기하자. 서두를 필요가 없으니까? 오히려 내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아. 계속해서, 오늘의 이야기를 하자. 그래, 그래. 먹은? 종이는? 그보다 앞서, 붓 중에는 다른 것도 있어.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 맨 죽필도 있고, 갈필이라는 것도 있어. 칡 갈(葛)자, 갈필 말이야.

경일아.
먹에 대해 이야기하자. 한 자루의 먹을 만들기까지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 이야기하자구.
먹을 만드는 데는, 대개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을 사용해. 그 그을음을 흙처럼 다져서 기다랗게 굳힌거야. 참기름이나 비자기름, 오동기름을 태운 그을음을 뭉쳐 다진 먹도 있지.
어떻게 만드냐구? 그래, 그래. 우선 아궁이나 가마를 만들어놓고, 소나무나 기름을 태우면 연기가 나겠지? 그 연기가 굴뚝으로 나가면서 그을음이 붙을거 아냐? 그 그을음을 긁어 모으는거지. 그것도 굴뚝의 맨 위쪽에 붙은 것일수록 좋아. 불길과 가까운 곳에 붙는 그을음은 굴뚝 끝 쪽에 붙는 그을음보다 품질이 덜 좋은거야. 여하튼 그 그을음을 긁어모아 아교풀로 반죽한 다음, 절구에 넣고 절굿공이로 찧는거야. 이때 얼마나 오랫동안 많이 절구질을 했느냐에 따라 또다시 먹의 품질은 차등이 생겨. 십만 번을 찧었으면 그만큼 품질이 좋은거야. 나무절구에 넣고 나무 절굿대로 찧었는지, 쇠 절구에 넣고 쇠 절굿공이로 찧었는지, 나무절구에 넣고 쇠 절굿공이로 몇 번 찧었는지에 따라 이름도 다르게 붙는거야. 이렇게 찧어 다진 것을 만들 먹의 모양새대로 만든 틀에 넣고, 다식틀에서 다식을 눌렀다가 빼어내듯 꺼내어 저 속에 묻어두는거야. 그래야 수분이 재 속에 스며들면서 천천히 마르지. 빠른 속도로 바람을 맞거나 햇볕에 말린다면, 모두 바스러져 버리거나 조각조각 틈이 생길 게 아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