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자동차로 초만원입니다. 출퇴근 시간의 도심은 마치 거대한 주차장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럼에도 거리가 완전히 막히지 않는 것은, 운전자들이 정해진 신호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각기 다른 이해관계로 얽힌 하나의 사회가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저 옛날 출애굽 사건도 그걸 말해줍니다. 줄잡아 240여만은 되었을 거대한 집단이 어떻게 그 오랜 세월을 견디며 가나안으로 향할 수 있었을까? 출애굽 이야기는 오늘날 교통신호와 같은 역할을 한 신호가 있었음을 말해줍니다(민 9:15-3). 저들은 언약궤를 모신 성막 위에 구름이 떠오르면 진행하였고, 성막 위에 구름이 내려오면 머물렀습니다. 출애굽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공동체의 약속으로 삼고 느리지만 지속적으로 이동했던 것입니다.

매 시대마다 시대정신은 공동체의 약속으로 작용하여 사람들을 결속시키고, 내일을 향해 나아가게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결속시켜야 할 공동체의 약속이 시대정신을 담아내지 못하거나 퇴행적일 때 공동체는 혼란에 빠지고, 삶의 현장은 아귀들의 싸움터가 됩니다. 상호존중은 사라지고 위선과 협잡이 난무합니다. 참은 힘을 잃고 거짓이 위세를 부립니다. 우리는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에서도 그 같은 현실을 목격합니다. 한 맹인을 둘러싼 유대인들과 예수의 대립(요 9:1-11)이 그걸 말해줍니다. 유대인들은 모든 질병의 원인은 부모의 죄이든, 자신의 죄이든, 죄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자비가 아닌 정죄가 중심인 세상입니다. 문제는 이런 정죄 중심의 세상은 병든 이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껴안는 데는 관심이 없고, 배척할 구실만을 찾게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배척당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바로 연약한 이들을 공동체로 받아들여야 할 시대적인 약속이 의미를 상실하고, 형식과 위선과 배제의 기제만 남은 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달랐습니다. 그가 맹인이 된 것은 누군가의 죄 때문이 아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는” 것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유대인들에게서 배제당한 맹인은 예수로 인해 눈 뜨임을 받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증언하는 놀라운 일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습니까? 당시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율법만이 온전하고 유일한 진리라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의 율법에 대한 충성심은 예수를 배척할 정도로 강력했습니다. 그런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소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지금까지 믿었던 세계가 붕괴되는 사건을 겪게 됩니다. 무엇보다 경악스러운 것은, 자신이 확신했던 진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단지 자기 확신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이 공동체를 결속시킬 약속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욕망의 실현과 다중 조작을 위한 신호만을 좇아간다면 미래는 암울해집니다. 만일 출애굽 백성들이 각자 자기만 살려고 했다면 저들의 광야 길은 죽음의 길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시대착오적인 율법수호에만 매달린 이전의 사울도 그렇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저주받은 자로 여겼습니다. 그랬던 사람이 자기 혁명을 겪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관점, 잘못된 믿음에 의해 고착 된 맹신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우리 시대가 거칠고 혼잡한 것은 공동체가 함께 가꾸고 지켜야 할 약속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공천파동 때 새누리당 조원진 의원이 그랬다는 “헌법보다 인간관계가 먼저”라는 말은 오늘날 대한민국이 ‘헬조선’인 이유를 웅변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심중’이 최우선인 권력의 역학 가운데서 나랏일이 잘될 까닭이 없습니다. 만일 출애굽 당시 ‘말씀보다 모세의 심중’이 우선이었다면, 가나안으로 향하는 여정은 피로 물들었을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함께 가꿔야 할 공동체의 약속이 권력의 정점으로부터 철저히 붕괴되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권력에 중독된 자들, 사기꾼들, 오직 돈만 중요한 자들, 최소한의 사회성조차 찾아볼 수 없는 재벌 2,3세들, 사이비 종교인들 등 제 이익이 먼저인 자들은 공동체의 약속(헌법)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유용한’(?) ‘인간관계’를 위해 목을 매고 있습니다. 저들로부터 흘러나오는 조작된 신호들은 사람들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평화를 말하면서 분쟁을 부추기고, 자신이 하고도 남이 그런 것처럼 태연합니다. 온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나쁜 신호에 우리 모두 농락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면 우리의 내일은 암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