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의 ‘꽃’입니다. 저 탁한 진도 앞바다 거친 물살에 희생된 이들이 자꾸만 생각나 절로 읊어본 노래입니다. 비록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이들이지만, 아주 떠난 게 아닙니다. 우리 곁에서 그 사랑스러운 이름들을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아들딸들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그들은 우리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마치 부활하신 예수처럼.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고통과 절망의 나락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실의에 빠진 제자 둘이 예루살렘을 등지고 엠마오로 낙향할 때입니다. 예수에게 걸었던 ‘이스라엘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앞으로 먹고 살 일도 걱정이지만, 엄습해올 박해를 어떻게 피할 것인지, 생각만 하여도 아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풀리지 않는 십자가 사건의 의문이 자꾸만 떠올라 생각에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저들은 이렇게 자기 생각에 골몰하느라 곁에서 동행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눅 24:16). 그러든 이들의 눈이 뜨여서 동행하는 이가 예수임을 알게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너>에 대한 사랑의 극치입니다. 동시에 <나>에 대한 사랑의 극치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항상 <나>만을 생각하느라 <너>를 잊고 삽니다. <나>만 살기 위해 <너>를 부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너>만을 잊고, <너>만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너> 속에 있어야 할 <나>를 잊고, <너> 안에 있어야 할 <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지금 온전한 <나>로서 사는 게 아닙니다. <나>만을 탐닉하는 <나>에게는 도무지 <너>가 없고, <너>가 들어설 자리 또한 없습니다. <나> 속에 <너>가 없는데, 어떻게 <너> 속에 <나>가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나>는 <너>만을 죽이는 게 아닙니다. <너> 속에 있어야 할 <나>를 다른 이가 아닌 내가 죽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착각에 빠져 기울어진 배에 탄 승객들처럼 죽음의 항로를 재촉합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은 <나>밖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나그네가 곁에서 동행하고 있는데도 그는 ‘낯선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던 이들이 홀로 밤길을 가야 할 나그네에 관심을 기울이고, 숙소에 데리고 가서 함께 음식을 나누면서 비로소 <너>가 보였습니다. 그분이 부활한 예수인 것을. <너>에 대한 관심이 잊고 지낸 <너>를 발견한 것이요, <너> 안에서 죽은 <나>를 살려낸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이처럼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현존하기도 하고, 부정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남’의 증표로 회개, 뉘우침, 도덕적 순결 등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거듭남은 <나>만을 탐닉하는 내가 <너>에 대해 눈을 뜨는 것입니다. <나>만을 위해 살던 내가 <너>로 가득한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나 밖에 모르는 희망은 희망이 아닙니다. 그건 희망으로 채색한 죽음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세월호의 참혹함은 두 종류의 사람들을 여실히 보여줬습니다. 오직 <나>만을 탐닉하는 자들과, <너>로 인한 연민으로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 이들입니다. <나> 가운데 <너>가 없는 자들은 어김없이 탐욕, 유기, 도피, 무책임, 무관심, 무능, 궤변, 자기면피로 일관했습니다. 그들의 심장에는 돈, 성과, 사업, 술수, 권력밖에 없습니다. 구역질나는 이들입니다. 저들은 <너>만 죽인 게 아닙니다. 수많은 <너>를 죽임으로 인해 이미 자신도 죽은 것입니다. 이와는 다르게 <너>를 향한 사랑과 연민으로 가슴 아린 이들이 있습니다. 단 한 생명이라도 더 살려내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바친 이들입니다. 그래도 그런 이들이 있기에 대한민국에 희미하나마 희망이 있지 싶습니다. <너>를 품고 사는 이들로 인해 부활은 우리 가운데서 현실이 됩니다. 진도 앞바다에서 고혼이 된 그대들은 우리 가운데서 부활해야 합니다. 그게 살아남은 자들이 용서받고, 치유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