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012

 

 

 

 

 

 

 

 

 

 

 

 

  말씀과 삶의 뜨락

 

‘갑’도 ‘을’도 아닌 이들의 목자

 

  말씀과 세상(55)

 

 

 

 

 

 

 

 

 





하태영

목사,
삼일교회.
htyyoung@hanmail.net






 


최근에 ‘진영논리’라는 말이 세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안철수 씨가 오랜만에 자신의 정치 지향을 묻는 기자들 앞에서 한 말입니다. 그는 만일 자신이 정치를 한다면 ‘진영논리’가 아닌 ‘공동체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겠다고 했습니다. 듣고 보니 참 신선한 말입니다. 그러든 저러든 그가 사용한 ‘진영논리’라는 말 이면에는 내편이든 네편이든 소속되지 않은 이들의 소외를 떠올린다는 점에서 음미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를테면 ‘갑’도 ‘을’도 아닌 이들이 겪어야 하는 소외 말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메소포타미아까지 도피한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 몸을 의탁합니다. 그는 거기서 양치는 일을 돌보며 아내를 맞이하고 자식을 얻고 재산도 불리게 됩니다. 그렇게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자수성가한 야곱은 고향땅 가나안으로 돌아갈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라반은 집안의 큰 일꾼인 야곱을 놓아주려 하지 않습니다. 하는 수 없이 야곱은 식솔들을 거느리고 외삼촌 집을 도망쳐 나옵니다. 이를 뒤늦게 알고 뒤좇아 온 라반이 야곱을 가로막고 하는 말입니다.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떼는 나의 양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창 31:43a). 외삼촌이라는 자가 날강도입니다. 알고 보면 세상이 그렇지요. 상대가 만만하면 터무니없는 구실로 남의 것인데도 제 것이라고 우깁니다. 지금까지 라반과 야곱의 관계는 ‘갑’과 ‘을’의 관계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억울해도 참아야 하는 게 야곱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라반은 야곱과 서로 침범하지 않기로 약조합니다. ‘미스바 약조’가 그것입니다. 야곱에게 상당한 힘이 비축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문제는 ‘갑’에도 속하지 못하고, ‘을’에도 속하지 못한 이들입니다. ‘갑’에도 구박 받고, ‘을’에도 구박 받는 이들입니다. 성경에서 ‘양’으로 은유하는 이들은 대체로 이런 무리입니다.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고아와 과부, 외국인들, 노예들, 서민들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목자로 말할 때는 ‘갑’에 의해서 ‘을’이 될 수밖에 없는 이들도 있지만, 대개는 ‘갑’과 ‘을’의 틈에 끼어 고초를 겪는 이들인 것이지요. 예수께서 “나는 선한 목자다”고 말씀하신 데는 바로 양과 같은 처지인 이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양은 자기를 보호할 능력이 없습니다. 선한 목자인지, 악한 목자인지 구분도 못합니다. 어리석기로는 양만한 짐승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양으로 은유된 백성들은 어리석고 불쌍한 존재입니다. 이를 가장 예리하게 간파한 이가 이사야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여호와는 나의목자”라고 고백한 시편 23편은 양처럼 어리석은 이스라엘의 처지를 절감한 시인의 노래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들 곁에는 양처럼 어리석은 이들이 많습니다. 자신을 먹잇감으로 삼고 쥐어짜는 데도 제대로 저항을 못합니다. 물론 양들을 유혹하고 파멸시키는 것들은 삯군 목자만이 아닙니다. 세속의 풍조, 사상, 정치, 종교 등도 때로는 해를 입힙니다. 공산주의는 한때 새로운 세계를 동경하는 이들에게 복음이었습니다.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20세기를 지배했고, 지금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본주의가 변신하여 ‘신자유주의’라는 화려한 옷을 입고 지금은 1% 대 99%의 세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갑’이 되기 위해, 혹은 ‘을’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을’에서 ‘갑’이 되는 걸 사람들은 성공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갑’이 된 나는 ‘을’의 처지를 잊고 삽니다. ‘갑’도 ‘을’도 아닌 이들의 소외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이 틈바귀에서 예수께서는 세상을 복되게 하시고, 풍요롭게 하신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국가 권력에 편승해서 번영논리 성공논리를 펴는 이들이지요. 이와는 반대로 예수께서는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변혁의 논리를 펴는 이들입니다. 이들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는 영락없이 진영논리입니다. 내편-네편의 힘이 강화될수록 싸움은 치열해보이지만, 저 옛날 야곱과 라반의 경우처럼 양진영은 적당히 묵인하거나 타협합니다. 필연적으로 어느 편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들의 고통은 가중되고, 진영논리 안에서 이들의 자리는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이들이라며 ‘갑’도 ‘을’도 아닌 이들을 먼저 살피는 게 정도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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