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012

 

 

 

 

 

 

 

 

 

 

 

 

  말씀과 삶의 뜨락

 

희망의 언어

 

  말씀과 세상(52)

 

 

 

 

 

 

 

 

 





하태영

목사,
삼일교회.
htyyoung@hanmail.net






 


우리는 대체로 받은 복을 헤아려 보는 데 익숙합니다. 그러나 복을 생산해내는 데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합니다.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우리가 받은 복이 아니라 생산해내는 것들입니다. 근자에 안철수 씨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물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가 받은 재능 때문이 아닌 세상에 생산해내는 것들이 복과 관련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획득한 것 못지않게 세상에 생산해내는 것들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생산해내는 것들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을 꼽으라면 말(언어)을 빼놓을 수 없겠지요. 풍부한 상상력을 유발시키는 말(언어)이야말로 메마른 시대를 촉촉이 적셔주는 희망의 언어임에 분명합니다.

언젠가 ‘내일’이라는 개념이 없는 마사이족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내일’이라는 개념이 없는 마사이족이 감옥에 갇히면, 신음신음 앓다가 죽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내일이면 출옥하게 된다는 생각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언자 스가랴의 언어들이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족합니다. 스가랴는 이스라엘이 바빌론 포로에서 1차로 귀환했을 때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그는 주로 환상의 언어로 활동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절망이라는 관념의 벽에 갇혀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상상하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스가랴는 “만군의 여호와” 라는 말도 자주 사용합니다. 구약에서 이 말을 쓸 때는 항상 이스라엘이 강대국 앞에서 초라한 신세로 전락했거나,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힘에 억눌려 있을 때입니다. 우리도 일제로부터 억압당할 때, 한국전쟁의 참혹한 시련 가운데서, “만군의 여호와시여!” 라는 기도로 크게 위로받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환상의 언어로 요한계시록을 빼 놓을 수 없지요. 요한계시록은 특별히 식사와 전쟁이라는 상극적인 언어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우주적임과 동시에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 밀착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식사의 경우, 요한은 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 행위를 전쟁이 아닌 평화에 동참하는 행위로 여긴 것입니다. 원수였던 자들이 창검을 내려놓고 한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면 그로서 평화가 이뤄진 것입니다. 남과 북의 동포들도 한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날 얼어붙은 한반도에 비로소 평화가 정착될 것입니다. 식사의 최종 목적은 어린양 예수와 한 식탁에 앉게 되는 것 즉 구원의 완성입니다. 이런 배경을 무시하고 환상의 언어를 어떤 비밀을 담은 밀서 같은 것으로 여길 경우 사이비 메시아관을 불러들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환상의 언어를 쓰는데 익숙합니다. 그는 에베소서 서론에서 “찬송하리로다” 라고 현재 완료형으로 시작하고, 마지막은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미래완료형으로 끝맺고 있습니다(엡 1:3-14). 구원의 확증 가운데서 사는 이들은 희망으로 시작해서 희망으로 끝나야 한다는 어법입니다. 바울은 또 “사랑하는 자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 안에서” 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모두가 세상의 고정관념을 탈각시키고 구원의 상상력을 유발시키는 표현들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은 어떤 환경에도 예속되지 않고 세상과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됩니다.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유명한 연설, “나는 하나의 꿈이 있다”는 환상 그 자체입니다. “나는 언젠가 모든 계곡이 높아지고 모든 언덕과 산이 낮아지며, 거친 곳이 평평해지고, 뒤틀린 곳이 반듯하게 만들어지는 주의 영광이 드러나, 모든 만물과 함께 그것을 바라볼 날에 대한 꿈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연설을 읽다보면 마치 저 옛날 이사야를 다시 만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날마다 수많은 언어를 생산해 냅니다. 대부분이 상상력이 결핍된 메마르고, 거칠고, 육적인 언어들입니다. 마음의 언어들은 항상 뒷자리로 밀립니다. 그래서 세상은 팍팍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한국교회가 생산해 내는 말들이 세상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은, 유창한 언변과 화려한 수사로 포장은 했지만, 인간의 관념에 포획된 언어이거나, 욕망의 성취만을 지향하는 언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가 생산해 내는 언어들이 세상의 희망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얄팍한 관념과 들끓는 욕망을 탈각시킨 계시의 언어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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