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 이태영 박사와의 만남에 이어.)

유학을 다녀와서 강의를 나가던 2002년 여름이었다. 순수 학문이 대학에서 인기가 없어지면서 내가 전공한 불문과도 사정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여서 교수채용이 드물었다. 그러다보니 불문과 공채만 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원서를 내봐야지 생각하던 차에 불문과 교수채용공고가 하나 났다. 그런데 지원자격에 세례기독교인이 있었다. 당시 신앙이 없던 나는 세례증명서 하나 때문에 모처럼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싶어 어떻게든 제출 기한 전에 세례증명서를 마련해봐야겠다 마음먹었다. 그 대학 교목도 찾아가 사정을 말씀드려보기도 하고 집 근처 교회 목사님도 찾아가 세례증명서를 부탁드려보기도 했는데 모두 거절하였다. 호통을 치는 분도 계셨다.

도저히 안 되겠구나 싶어 공채 지원을 포기하려던 차에 소포 하나가 도착했다. 유학 갈 때 부모님께서 보관하고 계시다 다시 보내주신 대학 시절 내 책이었다. 대학 4년 내내 쓰던 책이 달랑 라면박스 한 박스 분량이었다. 박스를 뜯어보니 대부분 수업 교재였는데, 그 중 유독 교재가 아닌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이태영 박사의 <나의 만남, 나의 인생>이라는 책이었다. 대학시절 우연히 서점에 갔다 이태영 박사 이름을 보고 평소 책을 잘 사보지 않던 내가 읽고 싶어 자발적으로 돈을 주고 산 것이었다. 잊고 있던 반가운 책을 보자 궁금해져 책을 열어 목차를 훑어보는데, 목차에서 ‘김영운 목사’의 ‘목사’에 시선이 멈췄다. 완전 아전인수 해석이지만, 나는 순간 ‘앗, 존경하는 이태영 박사님이 의지할 만한 목사님을 소개해주시나 보다’ 싶었다. 얼른 그 페이지를 찾아 읽어보았다. 글에서 이태영 박사는 젊은 시절 영어회화 과외를 받으려 소개받은 김영운 청년과의 만남을 회고하며 그 청년이 목사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태영 박사가 소개해주신 목사님 이름을 검색해보니 가리봉동의 <작은교회> 담임목사인 것으로 나왔다. 목사님 설교 방송도 나와 있어 여러 편 들어보았다. 직접 목사님을 찾아뵙고 내 사정을 진솔하게 말씀드려보고 싶어 편지를 준비해서 작은교회를 찾아갔다. 교회는 서광모드 건물 맨 위층에 있었다.

처음 교회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정면 책상에서 집필에 열중하시던 소매가 넓은 흰 남방을 입으신 목사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목사님은 낯선 방문에 약간 당황해하시더니, 이내 어떻게 왔는지 물으셨다. 나는 찾아온 용건을 말씀드리고 미리 준비해온 편지를 건네 드렸다. 편지를 보시더니 목사님은 나보고 주일 예배 때 다시 와보라고 하셨다. 또 다음날 월요성서공동체 모임에도 와보라고 하시고 그렇게 몇 번 교회에 오게 하시고는 다음 월요성서공동체 모임에 오면 세례증명서를 준비해놓겠다고 하셨다.

그날 월요성서모임이 아직도 잊어지지 않는다. 목사님은 여남은 명이 둘러앉은 모임 시작에 고뇌에 찬 음성으로 밑도 끝도 없이 거짓 증언에 대한 회개 기도를 하셨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몰라도 나는 알았다. 나에게 세례증명서가 교수지원 구비서류쯤으로 여겨졌던 것과 달리 목사님께는 그것은 결코 대수롭지 않은 서류 한 장이 아니었으며, 그날 회개가 내 잘못을 대신 져주시는 목사님의 희생에서 나온 것임을. 목사님 기도를 듣는 동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모임 후 목사님은 온화하게 나에게 세례증명서를 주셨다. 결과적으로는 그 지원에서 떨어졌는데, 이상하게 마음은 가볍고 홀가분했다. 목사님은 그해 크리스마스 예배 때 교인들 앞에서 나에게 진짜 세례를 주셨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그때 일을 글에 담아 드렸는데 목사님은 친구를 위한 우정이 보상을 받은 것 같다며 나를 친구라 불러주셨다.

2014년 2월 4일 목사님께서 돌아가시기 몇 주 전 꿈에서 목사님을 뵌 적이 있다. 꿈에서 목사님께서 내게 신발과 밥그릇인지를 맡겨주셨다. 그리고 목사님 곁에서 어느 여자분이 나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귓가에 작은교회에서 부르던 떼제 Taize 노래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Ubi caritas et amor Ubi caritas Deus i bi est.”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도 다시 누군가에게 친구를 위한 사랑을 나눌 때 하나님이 바로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깨우쳐주시는 목사님의 마지막 유언처럼 꿈에서 깬 뒤에도 노랫가락이 내 마음 속에 잠잠히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