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한테는 오랜 습관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 방이나 공간 안에 있는 사람에게 뭔가 묻거나 얘기할 것이 있을 때, 빼꼼히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문턱 부근에 서서 말하는 습관. 어지간히 익숙하고 오래 동안 관계 맺어온 사이가 아니라면, 들어와도 좋다는 모종의 신호가 있기 전엔 문지방을 넘어서지 않았습니다. 무턱대고 방 안으로 성큼 들어서는 경우는 아주 드문 일이었습니다. 내 영역과 네 영역으로 갈라지는 사이의 틈, 경계가 나뉘는 그 언저리를 저는 쉽사리 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시골 와서 사는 몇 개월 사이에 제 몸이 좀 달라진 듯합니다.

장흥 우리 집이 있는 동네에는 하루에 버스가 딱 세 번 들어옵니다. 자가용으로 가면 30분이 채 안 걸리는 읍내까지 한 시간 반을 이 동네 저 동네 깊숙이 돌아 돌아 갑니다. 여유가 있는 날엔 그 버스를 타는 것도 재미난 일이지만, 좀 바삐 움직여야 하는 날도 있습니다. 그럴 땐 머릿속으로 동네에 차 있는 어르신들의 일정을 훑습니다. 열 가구가 안 되는 작은 동네에서 몇 달 지내다 보니 동네 분들의 생활 동선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거든요. ‘내일은 장날이니까 읍내 나가실 거야.’ ‘금요일엔 늘 목욕하러 가시니까 그 때 끼어 가자.’ ‘○○씨는 보통 8시 20분에 출근하지. 그 때 태워 달라면 되겠다.’ 동네 분들도 지금 내 사정을 아시니까 여쭈면 흔쾌히 함께 가자 하십니다. 같이 오가다 보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고, 속사정도 차츰 알아가게 됩니다.

지난 가을, 겨울 얻어먹은 것도 참 많아요.

“순애야, 홍시 가져가라~”

“순애야, 호박죽 ○○이 아저씨 편에 보낼게. 근데 단호박이 별로 안 달아서 맛이 좀 그래. 너무 안 달면 꿀 좀 섞어서 먹어라.”

“오늘 칼국수 할 건데 이 아짐이 칼국수 면을 기차게 잘 뽑거든. 그러니까 아버지랑 점심 먹으러 와.”

마을 분들이 팥죽, 동치미, 열무김치, 시루떡, 만두 같은 음식이며, 키위, 상추, 케일, 고구마, 단호박, 옥수수 같은 농산물이며 이것저것 챙겨주신 덕분에, 늘 풍성히 잘 먹었습니다. 저도 “○○님~ 아버지가 배추 많이 뽑으셨는데, 갖다 드릴게요~” 하고 봉지에 담아 아랫집에 놀러가고, 반찬을 넉넉히 해서 옆집 사는 이모네에 콩자반, 즉석잡채, 우엉조림, 호박범벅, 시금치나물 등을 해서 나르기도 했습니다.

때론 이런 제 모습을 되돌아보며 생각합니다. ‘나 많이 변했네.’ 라고.

제 에니어그램 인성 유형은 ‘개인주의자’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4번입니다. 내가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 폐 끼치는 일이 되면 어떡하나, 내가 한 반찬이 입맛에 안 맞으면 어쩌나, 오만가지 생각 끝에 혼자 알아서 처리할 방법을 찾고, 나누기보단 물러서 있는 것이 예전의 제 스타일이었습니다. 이런 제가 바뀌어 가는 건 2016년에 겪은 여러 가지 상황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마을 공동체의 힘이 참 컸습니다. 수치심에 유난히 민감한 자의식을 깨뜨리는 힘!

자의식은 ‘나’와 ‘너’를 구별하고, ‘나’를 지키고 위험 요소로부터 방어하는 작용을 합니다. 하지만 이 자의식이 확장되고 비대해지면 자기 자신과 주변 세상을 주관적으로 읽어 내려가게 하고 진실을 왜곡해서 보게 합니다. 감정에 빠져 외톨이로 느껴지게도 하지요. 자의식이 팽창하는 걸 내 힘-자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습니다. 자아는 성격이 그 동안 반복해온 패턴을 고수해서 진행과정을 가속화시킬 뿐이니까요. 그래서 다른 패턴의 에너지를 쏴줄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작년 에니어그램 수련 중에 뇌졸중을 경험한 질 볼트 테일러 박사의 동영상 강의를 본 적 있습니다. 1996년 12월 10일 아침, 뇌과학자인 질은 4시간 동안 자신의 좌뇌가 정보처리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박사의 의식은 살아 있었는데, 그녀는 처음으로 좌뇌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자연스럽게 기능을 발휘하는 우뇌를 만납니다. 그녀가 경험한 우뇌의 세계는 신체와 외부세계의 구별이 없고, 너무나 평온하며 아름다웠다고 해요. 모든 것의 경계가 사라지고 오직 에너지장만을 인식하는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또 다른 뇌과학자인 김대식 교수의 이야기에 따르면, 우리가 보는 세계는 진짜가 아니라 ‘망막에 들어온 상에 대한 뇌의 해석’일 뿐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실제는 우리의 생각과는 정말 다른, 성경 말씀대로 그저 사랑 안에서 하나인 그런 세계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장흥에서 살아가려 합니다. 앞으로 제 신체가 더욱 쉽게 문턱을 넘나드는 몸으로 변화되길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