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설날은 구정이 아니라 설날이다.

설레는 날이다. 새로 사온 신발을 머리맡에 가지런히 놓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며 잠을 자는 날이기도 하다. 자다가 머리맡에 둔 신발이 잘 있나 더듬어 확인 하면서.

아침 일찍 새 신발을 신고 동네를 괜히 한 바퀴 도는 것도 연례적인 일이 아니었던가? 물론 발의 치수보다 큰 신발이긴 하지만 얼마나 기다렸던 새 신발인가! 남이 볼 때는 신고 있다가 남이 지나가면 얼른 벗어 집어 들고 맨발로 서있는 민화가 그 때의 현실을 잘 묘사하고 있다.

설날 새벽부터 소식 궁금했던 이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이런저런 이야기가 소곤소곤 들려온다. 소리가 점점 커지다 종래는 와 웃음꽃이 터지는 날이다. 이렇게 새해는 밝는다. 세배가 오간다. 덕담이 오간다. 그리고 서로 하나가 된다. 이렇게 옛날의 설날은 소통의 날이었다. 요즘 설날에는 스마트 폰으로 소통의 메시지가 온다.

“복 많이 받으세요.” 인사를 하면서 상대방에게 복을 기원한다. 내가 상대방을 위해서 하는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 나 이러한 기도는 복을 받는 사람보다 복을 기원해주는 사람이 더 큰 위로와 복을 받는다. 그래서 남을 위해주면서도 자신이 복을 받는 일이다. 그러나 “ 복 많이 만드세요!”는 어떤가?

능동적으로 ‘많은 복을 만드셔서 당신도 사회도 행복해지면 좋지 않을까요.’ 라는 더 높고 넓은 의미가 된다. 이렇게 문자를 보낸 지 십 수 년은 훌쩍 넘긴 지금 나에게 가르쳐주신 분께 감사드린다. 나의 지평이 높아지고 삶의 넓이가 넓어진 것을 느낀다. 지금도 내 문자함에 “복 많이 받으세요.”가 날아오는데 나는 “복 많이 만드세요.”라고 고쳐 읽는다.

덕담

세배를 드리자 “네가 합격하여 학교를 잘 다니는 구나” 라고 하시며 윗저고리에서 새 돈으로 세뱃돈을 주시는 어른을 만난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그때는 중학교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을까. 내가 합격하였다니, 그리고 아직 입학식도 안하고 학교를 아직 다니지 않는데...

그 분은 미래의 일을 덕담으로 현실화시킨 우리 조상의 지혜를 빌리신 것 이었다. 이렇게 세배를 받으시며 그 해의 바람을 현실로 표현하며 새해의 문을 열어주시는 그 분이 오래 기억된다.

나는 그 해 중학교를 떨어졌다. 그리고 재수의 길을 걷고 그 이듬해 중학교에 합격하면서 그 분의 말씀이 일 년 후에도 이렇게 실현되는 것이구나 라고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덕담은 “꼭 언젠가는 이루어지는 것”으로 믿게 되었다. 진실로 상대방이 이루고 싶은 것이 지금 이루어졌고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우리나라의 예로부터의 새해 덕담이었다.

그래서 덕담은 가정법이 아니고 현실의 구체적인 삶의 표현이다. 그 사람의 바람을 알고 그에게 실현된 바를 덕담으로 해주는 사람 참 멋있다.

올해 새해 덕담을 드린다. “2013년을 맞는 여러분. 예수그리스도가 당신이군요. 참 닮고 싶습니다.”

세뱃돈 드리며 세배를 하면

2012년 저물어 갈 때 나의 은사님께서 돌아가셨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돌아가셨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알았어. 내가 연락할 곳 있으면 연락할게”라고 끊었다. 유난히 추운 추위를 피하시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이제 또 설날을 맞는다. 언제부터인가 선생님께 세배를 드릴 때 세뱃돈을 드리며 세배를 드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사양하시더니 그 다음부터는 의례적으로 잘 받으셨다. 그 받으시는 것이 내겐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몇 년 지난 후 자식들과 함께 세배를 가기 시작하였다. 그 놈들은 설날이 되면 전날부터 “할머니 선생님께 세배가요?” 묻는 버릇이 있다. 왜냐하면 세뱃돈이 만만치 않게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럼 가야지” 설날은 그놈들이 부지런하다. 다른 때와 달리. 아니나 다를까 자식 놈들에게 직접 물어 보지 않아도 얼핏 들려오는 소리 “너 얼마야?”, “넌?” 대충 계산해 봐도 내가 드린 액수보다 훨씬 많게 놈들에게 돌아간 것이다. 내가 드린 것보다 돌아온 복이 많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장례 때 두 놈 다 내가 직접 부음을 알리지 않았음에도 조문 오는 것을 보면서 복을 많이 만들라는 말이 이런 것이 아닌가 한다.

이제 이들은 할머니 선생님으로부터 세뱃돈을 못 받겠지만 하늘의 복이 내린 것이 확실하다. 그들이 사는 것을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