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참 빠르게도 지나간다. 어느 땐 무의미하게 늘어져 있던 시간들. 또 어느 땐 정신없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치열하게 보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인간을 이해하고 돌보는 직업을 가짐에 감사드리며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니, 사람은 나 자신에서 우리들로 그리고 세계 인류의 평화에 관심을 넓혀가며 성숙해 가는 존재임을 기뻐하며 그 가는 길에 길동무가 되어 함께 걸어가는 자화상을 그려본다.

심리학자 에릭슨은「사람은 태어나서 성숙해가는 존재이며 단계별로 정신사회적 발달업무가 있다」고 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아기에는 부모로부터 오는 배려를 통해 세상에 대한 믿음을 배우고, 편하고 여유로운 배변훈련을 통해서 스스로의 힘을 조절하여 사용하는 자율성을 배우고, 부모님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어른놀이를 하면서는 자신을 주도해가는 능력을 발달시킨다.

초등학교시기에서 청소년기에는 어른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부지런히 습득해가면서 근면성을 익히고 근본적으로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는 어떤 직업을 가질까 그리고 어떤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할까에 대한 고민을 하며 정체성을 정립하는 시기이다. 이후로는 친밀성ㆍ돌봄ㆍ사랑을 중시하며 배우자를 만나거나 주위의 사람들과 관계에서 따뜻함을 체득하게 된다.

중장년기에는 사람들과의 친밀한 만남을 통해 많은 결과물을 내는 생산성을 배우게 된다. 이 시기는 가족과 자녀를 양육하고 돌보며 직업을 가지고 자신이 가진 역량으로 많은 결과물들을 양산하게 된다.

노년기에는 살아온 생을 돌아보며 과연 나는 잘 살아왔는가를 스스로 성찰하며, 내가 아니어도 나와 같은 일을 할 후진들이 있음에 감사하며 여유로운 삶을 살게 된다. 이 시기는 성취하고자 했던 일이 무엇이고 성취하지 못한 일은 무엇인지를 돌아보며, 좀 더 충실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자신을 통합하는 시기이다.

이제 생산기와 통합기를 동시에 남겨놓은 나는 과연 내 가족, 내가 속한 직장과 지역사회 그리고 국가, 나아가 내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늘에 못 다한 일이 무엇인가를 나 자신에게 엄중히 물어야하는 시점이다. 가족에게도 남은 숙제를 더 해야 하고 직장에서도 못 다한 일을 해야 하고, 나라에 대해서도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하는 책무가 있다. 더욱이 하늘 앞에 서면 나는 더욱더 왜소해짐을 실감한다. 많은 것을 주신 데 비해 돌려 드린 게 없어 죄송하기 때문이다.

에릭슨의 이야기를 적용하며 살려고 노력한 나는 어린 시절 발달과정에 충분한 양분인 돌봄과 사랑을 받지 못해 사람에 대한 믿음도 자율성도 주도성도 배우지 못한 어른들이 많았음을 알았다. 그리고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내재한 상처받은 아이들의 사랑을 받고 싶다는 울부짖음을 듣게 되면서 인간은 사랑할 존재이지 사랑을 요구할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되니 더불어 살기가 이전 보다 쉬워졌다.

온전하지 못한 부모에게서 온전한 사랑을 기대하며 받았던 상처를 하늘의 온전하신 부모가 채우고 계신다는 사실에 감동하며 상처 준 부모를 용서하는 가운데 지금도 나의 내면은 치유중인데, 이것은 10여 년 전부터 만나 온 에니어그램의 치유력 때문이다.

에니어그램 안에는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해 아픔이 생겼거나, 살아가면서 가족이나 사회구성원 사이에 서로 부딪힘이 심해서 오는 고통을 슬기롭게 대처하고 치유함으로써 그 어려움에서 여유 있게 벗어나게 하는 지혜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지혜는 우리가 서로 보듬고 더불어 가야하는 온전함을 향해 길 떠나는 순례자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또한 우리는 한 생명의 주인 안에 속해 있는 지체들이므로, 모두가 모여 하나가 되는 공동체를 구축해 나가야만 우리가 행복해 질 수 있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