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순, 공동체성서연구

 

 


10/2009

 

 

 

 

 

 

 

 

 

 

 

 

영혼의 논리와 언어

 

영혼의 종교(The Soul's Religion) (68)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책

토마스 무어 지음






 


가난한 보통 사람들의 벽과 안마당에다 쌀과 소똥으로 만든 그림들은 소위 더 개발된 지역에 사는 우리들이 상실하고 있는 영성적 세련을 과시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이 물리적으로는 복잡하나 종종 철학적으로는 얕고 나이브하다. 우리는 범죄자들이 순간적으로 광기에 사로잡혀서 범죄를 저지르거나 중역들이나 정부 지도자들을 부패로 몰아가는 순간에 그들 속에 살아있는 영을 볼 수 있는 상상력이 이젠 더 이상 우리에게 없다. 오늘날 경향은 악을 심리적으로 해석하며 그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치료 전략에 의존하려는 것이다.

현대 생활이 물질적이며 기계적인 일들에 대해서는 세련되어 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는 호기심이 일 정도로 나이브하다. 신학자를 청하여 빌딩이나 가정을 설계하는 데 개입하기를 바란다면 좀 심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우리는 집이 영혼의 피난처가 된다는 사실을 이미 잊어버렸다. 현대인들에게 자기 집이나 안뜰을 위대한 영적 힘에 대한 덧없는 이미지로 그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한계를 허무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보호를 위해서나 자신들의 직접적 환경을 신성화시키기 위하여 이미지를 사용해 왔다.

쌀로 그림을 그리는 인도 여성들은 쌀의 옅은 색을 이용하여 자기네 집을 비바람 막아주는 물리적인 세속적 보호처를 넘어선 영성적 의의를 지니는 곳으로 변화시킨다. 그들은 환경을 세례 하면서 신성함에 대한 상상력이 가득한 장소로 변화시킨다. 그들에게는 가정의 성소가 머리로 이해되는 은유가 아니고 구상적이며 강력한 그림으로 창조된 리얼리티이다. 이런 집에서 살면서 그들은 영성적 관점에 충분히 잠겨든다. 현대적 방식은 신성한 이미지를 초월적 비전을 가지고 환경에 완전히 스며들게 하기보다는 장식이나 교훈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의도하든 안 하든 간에 집이나 공공건물은 모두 이미지이다. 건축을 할 때에 우리는 대체로 그것이 지닌 이미지로서의 심오한 의미를 의식하지 못하고 그 밑에 깔려있는 잠재의식적 신화에 의하여 이끌린다. 줄 이은 커다란 자물통들과 전자 보안 시스템은 세련된 현대 서구의 삶이 얼마나 크면서도 슬픈 것인가를 말해준다. 상업 활동을 마친 시간에 상점들을 가로질러 철문을 내리는 것은 시간이 지난 뒤에 빠져 나오는 영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모든 벽이나 바닥의 빈 공간마다 그려진 그림이나 낙서들은 인도 농촌 벽에서 밖을 내다보는 코끼리와 공작들을 쌀로 그려놓은 것과 스타일이나 방법에 있어서는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전자는 어둡고 거칠은 억압된 종교의 표현이고, 후자는 기쁘고 명백한 종교적 감성의 천명이다.

우리는 종교와 영성을 둘 다 의식의 형태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쌀 그림은 영적인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삶의 구체적인 방식으로서 종교를 묘사한다. 이 시골 동네에서는 악이 그 밖의 어떤 것과 같이 리얼하다. 악이 양육이나 사회정의에 있어서 실패로 상상되지도 않는다. 악은, 융이 자주 경고하였듯이, 선의 부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부정적인 현존이다. 하여, 악은 단순히 사회학적 분석이 아니라 구체적인 대응을 요구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영은 리얼하다. 그럼에도 문자적인 것은 아니다.

미켈란젤로는 다만 대리석 속에서 드러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형체를 단순히 드러내기만 한 것뿐이었다고 말한다. 인도 여성들도 쌀이라는 소박한 물질 속에 내포되어 있는 뭔가를 비슷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그들의 손에서 쌀은 성만찬처럼 다루어진다. 거기에 내재된 잠재적 신성은 예술가는 아니지만 예배자로인 여성들의 재빠르며 확신에 찬 손가락에서 나온다. 종교에서는 대체로 극히 평범한, 이를테면, 빵과 포도주, 허브의 잔가지들, 물그릇 같은 것들이 심오한 내면성을 지닌 것으로 드러난다. 그들이 지닌 신성은 그들 속에 있는 여러 겹의 의미로서 쌀 한 톨에 담긴 전 세계, 하루의 그림 속에 담긴 영원이다. ‘이것은 나의 몸이다 Hoc est corpus meum’ 쌀즙은 평범한 집을 채플로 변화시킨다.

빵과 쌀은 주성분으로서, 악을 느끼고 살아낸 두려움인 만큼 기본적이다. 종교적 상상력이 그들을 변화시키며 그들이 지닌 상징적 힘을 강조한다. 의식의 맥락에서 보면, 우리를 몰기도 하고 형성하기도 하는 원초적인 힘을 끌어내는데, 먼 것도, 지나친 해석도, 추상적인 것은, 기술 속에 숨은 것도 사람이 아닌 형태다. 쌀 그림을 그린 집은 영성의 강렬함을 더하여 찾아오는 사람이 들어서기 전에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 수도 있다.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 똑같이 사람들은 그런 힘이 있어야 위협하는 세력들을 다룰 수 있다.

우리 가족이 집을 지을 때, 우리는 원초적인 질감과 무시간적인 외형을 갖추려고 애썼다. 하지만 목수들과 건축가들을 확신시켜, 내가 느끼기에 힘을 약화시킨 무의미한 장식품으로 치장하도록 만드는 것이 어려웠다. 나는 친화적이지 않은 집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정직하게 하자면, 원초적이어야 하고, 원초적이려면 너무 쉽게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 방문객이 그곳의 영들을 예민하게 느끼고 머뭇거리기도, 멈추기도 하고, 노크를 하기 전에 둘러보기도 해야 될 것 같았다. 두려움과 떨림은 영성문화의 중요한 부분이다.

고르곤 gorgon 같은 괴물이나 용이나 험악한 사자가 건물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의미가 있다. 어떤 의의 있는 공간에 걸어 들어가는 것은 기회와 위협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새로운 세계의 도전에 직면하는 것과 같다. 그런 이미지들은 12궁도 zodiac나 지구상의 신성한 삶을 만들기도 하고 에워싸기도 하는 동물들이 이루는 원을 반영한다. 그들이 상기하는 뜻은 건물이 또한 야수라는 것과 건물을 단순한 공간과 혼동하는 사람은 스스로 난처하게 되는 것이다.

종교가 가정 안에서 자리 잡지 못하면, 그 어느 곳에서도 강해질 수는 없다. 교회는 가르침의 모델이요, 예와 근원이 되는 반면에 가정은 종교의 요람이다. 가족들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사제요, 주교요, 구루 guru이다. Cathedra는 의자다. 우리가 앉는 자리가 우리가 갖는 파워다. 교황청 Holy See은 거룩한 자리다. 그 낱말들은 의자를 가리키는 라틴어에서 비롯되었다. 집에 있는 의자들은 신성하며 우리의 교황청을 상징한다. 우리 삶의 좋은 부분이 가정에서 생기고, 우리 주변 세계에서만큼 가정에서 종교가 필요하다.

우리의 삶에 대하여 권위를 가지고, 안전감과 소속감을 느끼며 집에 앉아 있는 것은 모든 종교 행위 가운데 가장 큰 것을 수행하는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신념을 세우고 우리 자녀들에 대한 귀중한 교육을 시행한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자녀들과 우리의 삶과 우리의 사상을 창조한다. 우리 집에 안전하게 있을 때 밤 시간이나 그림이 안 그려진 곳에서 배회하는 악령으로부터 안전한 성소를 거기서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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