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순, 공동체성서연구

 

 


6/2008

 

 

 

 

 

 

 

 

 

 

 

 

영혼의 논리와 언어

 

영혼의 종교(The Soul's Religion) (52)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책

토마스 무어 지음






 


우리에게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제 발로 찾아드는 새로운 신비적인 삶에 대한 초대장을 우리가 조신하게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믿고 우리 자신의 계획과 디자인만 영웅적으로 추구할 것인가?

처녀에게는 차지할 자리가 별반 없다. 내가 미디어와 만나러 뉴욕에 갈 때면, 강인한 젊은 여성들을 많이 만나는데, 그들의 목소리는 깊고 강하고, 때로는 인위적으로 그런 것 같은데, 그들의 매너는 빠르고 사업적이다. 전문직 여성들은 흔히 이런 능력의 인물로 자신을 나타내며 만만치 않은 의상을 입고 힘차게 말하는 태도가 자신이 처녀라는 것을 감추는 식이다. 그러나 영성 공동체를 찾아가 보면 처녀는 도처에 있다. 환경과 건강과 온갖 순수성에 대하여 극도로 민감하다. 소년의 영을 따라 살면, 사람들이 자신의 비전과 이상을 추구한다. 그러나 처녀의 영을 따라 살면 세상은 섬세하게 다루어야 할 푸른 정원이다.

처녀의 판타지는 부적절하고 한 발 벗어난 것 같고, 아마도 이런 각도에서 나오는 영성의 위험은 세상과 동떨어진 평화와 완전의 섬을 만들려는 경향이 있다고 판단할 사람이 더러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런 에덴동산들을 가꾸는 것은 삶과 공동체를 아주 매력적으로 만들어서 세상이 주목하게 된다. 확실히 에밀리 딕킨슨도 강렬한 처녀의 감각을 가지고 앰허스트에 있는 자기 집을 꾸며서 자신을 위하여 별난 삶을 꾸렸다. 그의 말과 이미지는 계속해서 인상을 남기며 또 도전이 된다. 그런 것이 첫 눈에 보일 때처럼 부서질 듯이 약한 것이 아니고, 그런 식으로 표현하면서 그가 보여주는 것은 처녀가 일종의 파워와 힘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릴케의 시는 이와 같은 처녀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정교하며 깊은 내면성을 지닌 자족하는 세계로부터 말한다. 문화가 그 속의 예술과 학문생활이 지닌 영혼의 가치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갈 때, 릴케는 더욱 더 시대착오적이거나 아마도 구식 학교 같이 나타나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섬세한 이미지와 미묘한 감지력은 그 자체의 내면성으로부터 힘을 받아내는데, 그런 내면성은 당대의 수많은 작가들의 팽팽한 합리적, 정치적인 태도들 보다 더 이상하리만큼 든든한 기초 위에 선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아마도 내가 그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내가 처녀의 영성에서 아르테미스의 강렬한 현존을 보는 것 같다. 모든 일을 자연스럽게 한다는 생각이나, 성별을 분리시켜 보는 것이 아니라면 계속해서 명백히 구분 짓는 것이나, 그런 문화의 비즈니스 센터의 껄끄러운 분위기로부터 떠있거나 보호받는 상태를 지속하는 일이나, 심지어는 아프로디테적인 관능을 가지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우아함을 가지고 춤추는 일 같은 것, 이 모두가 아르테미스의 징조다. 아홉 살짜리 소녀들을 돌보는 일이 그의 일이었고, 그래서 아르테미스와 처녀 사이에 중첩되는 부분이 있다고 하는 것이 말이 된다.

원형을 살아내는 방식은 많이 있다. 그 하나는 그와 일차적으로 그리고 철저히 동일시하며 그의 방식에서 라이프스타일과 의미의 근거를 찾는 일이다. 또 하나는 여럿 가운데 하나로서 이런 영을 가꾸면서, 그를 어떤 형식으로 한정짓지 않은 채 가능한 한 많은 것을 그로부터 얻어내는 일이다. 최상으로 봐서, 원형이 그늘 속을 통과하며 빛이 흐르는 것 같고, 천연 종이의 거치른 조각 위에 수채화처럼 혼합이 되는 것과 같다.

원형을 살아내지 않는 길은 적어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가 영이라는 것과 가늘기는 하지만 움직이며 떠다니는 작은 거미줄 같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그 대신에 그를 문자 그대로 그 자신의 캐리커처가 되게 하는 일이다. 한 사람의 연약한 처녀 이상의 아무것도 될 수 없는 것이나, 아니면 그저 이런 이미지의 껍데기만 살아내서 결국 생명도 깊이도 별로 없는 것이 된다. 또 하나의 길은 이런 영을 무시하든지 부적절하고 약하고 심지어 구역질난다고 전적으로 얕보든지 하는 것이다. 이런 후자의 경우, 억압당한 원형이 문제와 위험으로 돌아올까 봐 우리가 조심해야 한다. 나는 이런 원형을 환각 상태로 몰든가 원형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속에서 이런 자동적이며 미친 듯한 처녀를 본 일이 있다.

과거의 화가들은 수백 가지 버전으로 수태고지 Annunciation 를 그렸다. 그 속에서 그들은 처녀의 이미지를 관상했는데, 그 처녀는 순진무구한 상태에서 홀로 앉아 독서를 하고 사색도 하는데, 그리고 나서는 예리하게 천사와 그의 메시지로부터 물러선다. 이 섬세한 젊은 여인이 인류문명의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에게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제 발로 찾아드는 새로운 신비적인 삶에 대한 초대장을 우리가 조신하게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믿고 우리 자신의 계획과 디자인만 영웅적으로 추구할 것인가? 수태고지의 처녀는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낼 것인지 피할 것인지 기다려 보는 우리들의 각자이기도 하다.

처녀는 기대와 태세의 순간이며, 수태되려고 기다리는 췌약성 그 자체이기도 하다. 우리가 자신을 위하여 어떤 영성을 찾을 때, 우리는 특별히 이런 종류의 부름을 받을 수도 있다. 즉, 우리 자신만이 홀로 있는 시간 privacy과 우리의 섬세한 세계를 돌봄으로써 우리를 온통 변화시킬 메시지가 올 때를 맞을 태세를 갖추는 것이다. 이런 메시지가 어느 한 개인에게는 안 오고, 자신들의 기대를 가꾸는 수많은 처녀들에게 올지도 모른다. 이는 약속의 영성이며 순결한 (처녀의) 순수성과 모든 미완성의 개방성 속에 있는 완전하며 의미가 있는 태세의 영성이다.



그들은 주술로
악마와 천사들의 영을 불러내어 심었다.

똑같은 형상으로 거룩하고 신성한
의식을 통하여...동상에
영혼과 의식을 불어넣고,
영이 충만하여 큰 일을 하게
만들고... 동상들이 사람들을 병들게도 낫게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헤르메스 트리스메기투스, 아스클레피우스

25. 이미지 숭상

이미지는 힘찬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 비낭만파는 숫자와 추상을 선호한다. 그러나 영혼으로 사는 사람들은 이미지의 중요성을 알고, 이미지를 관념이나 해석으로 환원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합리주의와 기술의 시대 속에서 낭만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별난 사람이 되고, 서클 밖에서 삶의 의미를 모두 쥐어짜듯이 해서 몇 개의 사실과 규칙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을 싸워서 물리친다. 우리의 종교성은 더 깊은 영적 지성을 찾으면서 이미지가 지니는 안개구름이나 신비주의 속에 계속 남아 있으려는 의향에 따라 정의된다.

 

 

 

 

 

 

 

 

 




120-802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1동 152-28 2층   Tel 02)312-6803, Fax 02)374-7277
  cbsi@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