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순, 공동체성서연구

 

 


12/2003

 

 

 

 

 

 

 

 

 

 

 

 

영혼의 논리와 언어

 

영혼의 돌봄 Care of the Soul

 

  (63)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책

토마스 무어 지음










 


꿈: 영혼으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

어느 서점을 가든 그 서가를 보면 꿈을 통해 접근하려는 작업이 매우 많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꿈을 대할 때 그 꿈을 보전하여 의미가 드러나게 하고, 영혼을 보다 잘 돌볼 수 있도록 꿈을 다루기 위해서 주요한 태도와 전략에 대해 몇 가지 구체적인 제안을 하고자 한다.

꿈으로 치료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꿈에 대하여 심각한 자리매김을 하는 덜 형식적인 습관에 대해서 모델이 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한 시간 정도의 치료를 받으러 오면, 나는 그 시간에 꿈 한두 가지 이야기를 듣는다. 나는 꿈에 대하여 경청한 다음에 즉시 해석을 하려는 노력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다. 꿈을 마스터하고 즉각적으로 뜻을 헤아리기보다 그 꿈을 새로운 영로 속으로 들어가는 길잡이로 삼는 것이 더 낫다. 꿈에 대해 다 듣고 나면 우리는 계속해서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치료는 거의 언제나 삶의 정황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 꿈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심층적인 인생론을 펼치도록 이미지와 언어를 제공하는 것에 주목한다. 보통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인생문제는 결국 그 문제에 대하여 충분한 상상력을 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에 당면했을 때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문자 그대로의 해결책을 찾곤 한다. 하지만 그방법을 통해 정확한 효과를 얻는 일은 드물다. 왜냐하면, 그 문제란 부분적으로도 상상력의 결핍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꿈은 참신한 관점을 제공해 준다.

치료할 때, 치료사나 환자 피차가 꿈을 해석하여 이론이나 합리화를 끌어내야 한다는 유혹을 받는다. 그런데 그 결과는 단순히 치료사의 생각이나 환자의 문제되는 태도를 뒷받침해줄 따름이다. 우리가 꿈을 해석하여서 우리가 지니고 있던 생각에 가장 잘 들어맞도록 똑똑하게 구는 것보다는 오히려 꿈이 우리를 해석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좋다.

나의 경험은 꿈이 천천히 점차적으로 환자나 치료사에게 그 자체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내가 꿈 이야기를 들으면 보통은 몇 가지 인상이나 아이디어가 즉시 표면에 떠오른다. 그러나 또한 이미지에 대해서는 많은 혼란이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의미를 가지고 꿈을 극복할 필요를 억제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꿈의 무드를 용인하고,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 때문에 내가 confound 되게 하고, 그 꿈의 미스터리를 고찰하기 위하여 나의 확신으로부터 내 자신을 돌려 세운다. 꿈에 대하여 인내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그리고 길게 보면, 지식이나 기술이나 트릭을 쓰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이다. 꿈은 자체의 시간표에 맞춰서 자체를 드러내지만, 드러내기는 꼭 드러낸다.

직관의 지적인 해석과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 직관을 믿고 신뢰하는 것은 중요하다. 예를 들자면, 때때로 한 사람이 나에게 꿈 이야기를 해주고, 즉시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을 권면하거나 등장인물 가운데 한 여성이 꿈 이야기를 하면서, 꿈속에서 자기가 정신없이 현관문을 열어 놓아서 어떤 남자가 그 집안으로 몰래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하는 것이 있다. “그건 악몽이에요. 내 생각에는 내가 너무 부주의해서 내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 꿈이 나에게 일러주는 거예요. 나는 너무 열려 있어요.”

보다시피, 나는 꿈 이야기와 함께 해석도 들었다. 나는 꿈을 다루는 경험도 꽤나 많이 하였고, 환자가 나에게 말해주는 아이디어를 여과 없이 받아들이지 않도록 훈련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나는 때때로 그런 해석에 의해서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그만큼 해석이 합리적이다. 물론 그 여성은 취약하고 침입자에 의하여 위협을 받는다. 그러나 그런 때에 나는 나의 제일 법칙을 기억한다. 즉, 직관을 믿고 신뢰하라. 나는 ‘우연히’ 문을 열어놓은 것이 이 사람을 위하여 나쁜 일이 아닐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문을 열어놓은 일이 그의 삶의 공간에 새 인물이 들어서도록 허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동시에 의식하는 것은 비의도적인 일이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문에 틈이 생긴 것은 오로지 자아에 대해서만 사건일 수 있다.

종종 꿈속의 자아와 깨어 있는 꿈꾸는 사람 사이에는 명백한 공모가 있다. 꿈꾼 사람이 꿈 이야기를 할 때, 그 이야기를 꿈속의 ‘나’의 방향으로 기울어지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꿈속의 등장인물들과의 관계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도록 확신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때로는 지나치게 보상하려고, 내가 꿈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히려 역전된 태도를 취하려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내가 꿈꾼 사람과는 다른 각도를 고려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더 기술적으로 표현하자면, 꿈 이야기를 하면서 꿈을 꾼 사람이 꿈속의 자아와 똑같이 컴플렉스 속에 갇혀 있다는 가정을 한다. 만약 내가 꿈꾼 사람의 이야기를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나는 그 사람의 콤플렉스 속에 붙들리게 되고, 그러면 나는 소용이 없다. 그래서 나는 꿈꾼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즉, “아마 평소에 문을 닫아야 한다는 생각이 이 경우에 잘 되지 않았다 해서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마 그것 때문에 누가 들어온 일이 덕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적어도 우리는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지요.”

꿈속의 다른 등장인물을 대변해 주는 것이, 때로는 꿈꾼 사람의 선입견에는 반대가 되겠지만, 탁월하게 뜻을 드러내주는 시각을 열어 줄 수 있다. 명심할 것은, 영혼의 돌봄이 반드시 자아의 돌봄을 뜻하지는 않는다. 다른 등장인물들도 받아들여지고 이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반대할 만한 행동과 등장인물들도 어쩌면 필요하고 또 가치 있다고 고려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

한 여류 작가가 꿈 이야기를 하는데, 꿈속에서 자기 친구가 크레용을 가지고 자기 타자기에 문대는 것을 붙잡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하였다. “그건 정말 지독한 꿈이었어요.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 나의 내면의 아이가 나의 성인의 일을 늘 간섭하는 거예요. 내가 자랄 수만 있다면!”

이 사람 역시 재빨리 해석으로 치닫는 것을 주목한다. 그보다도, 자기의 꿈과 관련해서 내가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을 그가 바라는 것이다. 아주 미묘하게, 이런 욕망은 그 꿈의 타자성 즉 꿈의 도전에 대한 방어가 된다. 영혼과 자아가 흔히 투쟁을 하는데, 때로는 그 싸움이 부드럽지만 때로는 야만적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꿈의 내용에 대하여 옳다고 가정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꿈속에서 당신의 친구가 어린이였어요?”

내가 묻는다.

“아니오, 어른이었어요. 생시에 먹은 나이 그대로예요.”

“그러면 왜 그가 계속 유치하다고 생각합니까?”

“크레용은 유치한 거니까요.”

아주 명백한 것을 천명하듯이 말한다.

“이 친구에 대해서 얘기해 줄 수 있어요?”

나는 그가 꾼 꿈에 대한 강력한 견해로부터 자유롭게 풀려나도록 도우려 노력한다.

“그 친구는 매우 고혹적이에요. 말이에요, 늘 이국적인 옷을 입어요. 화사한 색깔에다 짧게 입지요.”

나는 그가 연상 작용에 근거해서 비약한 것을 가지고 말한다.

“이렇게 화려하고 육감적인 여성이 당신의 작품에다 색깔과 몸과 어린이의 어떤 긍정적인 성품을 더해주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생각하기에 따라 가능하겠지요.”

그가 말하지만, 아직도 자신의 더 만족스러운 해석에 배치되는 것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는 태도였다.

내가 그 작가의 꿈 해석에서 돌아서게 한 것이 여러 가지가 있는 가운데, 하나는 꿈속의 자아가 지닌 콤플렉스에 빠지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원칙과는 동떨어지게, 부정적인 나르시시즘이 어린이에 대한 그의 판단에서 나타난 것이다. 즉, 그는 자기 자신의 어린이 같은 방식을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았다. 그가 보통 자신에 대한 사고방식에 집착하는 것, 즉 그 꿈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다 강렬하게 채색하는 그런 태도에서 우리가 일단 옮기고 보니까, 우리는 한 발 앞으로 나가서 그의 실제 삶의 상황과 개인적인 습성에 대하여 진정으로 신선한 아이디어를 고찰하게 되었다.

이제 꿈에 대하여 좀 상세히 이야기하려 한다. 그 까닭은 꿈이 우리에게 우리의 습성이나 본질에 대하여 많은 통찰을 갖게 해 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가 꿈에 대하여 연관짓는 방식이 우리가 온갖 것을 다루는 방식을 나타내 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의 과거와 현재 상황과 문제, 그리고 더 큰 의미에서는 문화에 대한 해석이 모두 포함되어 나타난다.

예를 들자면 꿈에 대하여 또 하나 경험으로 말하자면, 단 한 가지 결정적인 해석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때에는 똑같이 꿈이 전적으로 새로운 뜻을 드러낼 수도 있다. 나는 꿈이 그림인 것처럼, 그림이 꿈인 것처럼 대하고 싶다. 모네의 풍경화가 그것을 관상하는 사람들에게 저마다 다른 무엇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 그림은 같은 사람에게라도 다르게 볼 때마다 전혀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여러 해를 두고, 좋은 그림은 그대로 힘을 유지하면서 매혹시키거나 만족감을 주거나 새로운 환상과 경이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꿈에 대해서도 똑같이 맞는 이야기가 된다. 꿈은 평생토록 방치해도 수많은 해석으로 공격해도 그대로 살아남아서 아이콘이 되거나 몇 년을 두고 성찰해야 할 만큼 상상의 여지가 있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요점은 꿈을 가지고 작업할 때 결코 최종적인 의미로 해석하지 말 것이고, 가능한 한 많은 의미와 상상적인 명상을 끌어내면서 그 꿈을 존중하며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꿈속으로 들어가면 상상력을 되살려야지, 고착된 질린 습성 속에 가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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