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책 (2001. 8)

영혼의 돌봄 (Care of the Soul) 36

토마스 무어 / 김영운 옮김


제 7 장 우울이 가져다 주는 선물

영혼은 여러 가지 다양한 색깔로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데, 거기에는 농도가 각기 다른 회색, 청색, 흑색 등이 포함되어 있다. 영혼을 돌보기 위하여 우리는 모든 색깔의 농도와 범위를 모조리 살펴야 하며 오로지 백색, 적색, 오렌지 빛 같이 밝은 빛깔만을 인정하려는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오래된 흑백 영화를 천연색으로 만들려는 '밝은'아이디어는 우리 문화가 대체로 어둔 색과 회색을 거부하려는 경향과 일치한다. 삶의 비극적 의미에 대하여 방어태세를 갖추는 사회 속에서 우울증 은 적으로 또는 불치의 병으로 보이지만, 밝은 빛에 크게 기우는 사회 속에서도, 우울증은 보상이 나 하려는 듯이 유별나게 강하게 하는 수가 있다.

영혼의 돌봄에 있어서 영혼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세 가지 방식을 감상할 필요가 요청된다. 우울 증에 직면하여 우리는 스스로 물을 수 있다. "이게 여기서 뭐하는 거야? 무슨 필요한 역할이 있다 는 거야?" 우울증을 다룰 때 특별히, 이것이 죽음에 대한 우리의 감정에 가까운 기분으로서 인식하 며, 우리가 쉽게 빠져드는 감정으로서 죽음을 거부하려는 심정을 막아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서, 우울증을 맛보는 능력을 개발해야 할 지 모른다. 즉, 영혼의 위기에 대해서 우울증이 차지하려 는 자리를 긍정적으로 존중해야 할 지 모른다. 어떤 느낌과 생각들은 오로지 어두운 기분일 때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기분을 억제하 면, 그와 연관되는 아이디어나 성찰 또는 억제하게 될 것이다. 애정의 표현은 사랑의 감정을 위한 것이기에, 우울증은 가치있는 '부정적'감정을 위한 중요한 채널이 될 수도 있다. 사랑의 감정은 자연스럽게 애착의 제스처를 낳는다. 똑같은 방식으로 우울증이 지닌 공허함과 우중충함은 밝은 기분의 스트린에 가려 있으면 나타나지 않은 의식이나 명료한 생각을 불러 일으킨다. 때때로 사람 들은 어두운 기분으로 치료를 받으려 온다. 그러면서, "오늘 사실은 안 왔어야 하는건데.." 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 주에 좀 더 좋아지면, 그때 와서 상담을 해야 되겠어요." 라고 말한다. 그러 나 나는 그가 찾아온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그가 명랑한 기분일 때는 도무지 들을 수 없는 그의 생각을 그때는 들을 수 있고 그의 영혼도 함께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영혼에게 기회를 주어서 다른 어떤 측면만큼 다양한 본성의 또 다른 측면을 표현하게 해준다. 그러나 이런 것은 우울증이 지닌 어둠이나 쓴 맛 을 싫어하면 깊이 감추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농신(Saturn)의 아이

오늘날 우리는 슬픔(sadness)이나 우울증(melancholy)보다는 우울(depressi-on)이라는 단어를 선호한다. 아마도 이 단어의 라틴어 형태가 한층 더 임상적이고 또 진지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때 오륙백 년 전 쯤에 우울증은 로마의 농신(Saturn)과 동일시 되던 시대 가 있었다. 우울증에 빠지는 것은 '농신 속으로' 빠지는 것이었으며, 만성적으로 그리고 그 신과 관련된 항성과 동일시 되기 때문에, 우울증의 농신의 다른 특성과 관련지어 생각하게 되었다. 농신 은 황금시대를 주재하는 '노인'으로 알려졌다. 우리가 '황금시절'이나 '한창때'를 말할 때면 의레 껏 우리는 과거를 지키는 보호자인 이 신을 불러낸다.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은 흔히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갔고 현재나 미래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우울한 생각들은 지 난 날을 선호하는 농신에게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추억과 더불어 시간은 지나간다는 감각을 위한 생각이다. 이런 생각과 느낌은 비록 슬픈 것이기는 하지만, 영혼이 시간과 영원 양쪽에 머물 기를 원하는 욕망을 뒷받침 해 준다. 그래서 이상하게도 그런 감정이나 생각들은 즐겁기도 하다.

때때로 우리는 문자 그대로 나이를 먹는 것과 우울증을 연결시켜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영 혼이 나이를 먹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경험도 쌓고 지혜까지 얻어가는 것처 럼 삶이 계속 전진한다는 실질적인 생각이 나게 만든다. 심지어 삼십대 중반이나 후반인 사람이 이 야기하는 가운데 이십 년 전에 있었던 일을 끄집어 낸다. 그러다가 충격을 받으며 멈춘다. "내가 전에는 이런 식으로 말 한 적이 없는데, 이십 년 전이라니, 내가 나이를 먹어가는구나."

이것이야말로 농신이 주는 나이와 경험의 선물이다. 청춘으로 동일시하고 나서는 영혼이 긍정 적이며 도움을 주는 나이의 중요한 특징을 갖추게 된다. 만약, 나이를 부정한다면, 영혼도 부적절 하게 청춘에만 매달리다가 상실되고 만다.

우울증은 문자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를 갖추는 경험으로서의 선물을 우리에게 안겨 주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거치면서 나이도 들고 더 지혜로워지는 삶을 살았다는 느 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인생이 고난이라는 것을 알 뿐 아니라 지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은 거침없이 생기 발랄하게 청춘의 순진함을 줄길 수 없게 되고, 상실감 때문에 슬픔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자기 수용과 자기지식을 새롭게 느끼는 데서 얻는 기쁨을 아울러 누리 게 해주는 인식이 생긴다. 나이를 이토록 의식하게 되면 거기에는 우울증이라는 후광이 생기게 마 련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느 만큼의 고상함도 곁들어진다. 우리는 우울증이라고 부르는 농신의 침 입에 대하여 자연히 저항을 하게 마련이다. 청춘을 붙잡던 손을 놓아 보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 일은 곧 죽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가운데서 영원한 청춘을 선택하고자 하는 사람은 한바탕 우울증과 씨름하는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가 대접을 소홀히 하면 농신이 집으로 찾아오게 만드는 꼴이 된다. 그렇게 되면 농신이 안겨주는 우울 증이 이러 저러한 이유로 청춘과 희롱하며 장난치던 영혼에게 색깔의 깊이와 실체를 더해 준다. 농 신이 사람이 나이 먹으면서 풍상을 자연스레 겪게 하는 것은 마치 기온과 바람과 시간이 곡간에 풍 화작용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농신 속에서 성찰은 심화되고, 생각은 더 크게 시간 감각을 끌어안 고, 긴 인생의 수많은 사건들은 증류되어 본선의 의미로 승화된다.

전통적인 문헌에서 보면, 농신은 차갑고 거리감이 있는 특징으로 묘사되지만 동시에 다른 속성들 도 지니고 있다. 의학 서적에서는 그를 '지혜와 철학적 성찰의 신'이라 불렀다. 성공한 정치가이 자 시인이었던 죠반이 카봘칸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피치노는 책을 쓰면서 학자들과 특히 대단 히 학구적인 사람들에게 경고하기를, 자신들의 영혼 속으로 농신을 너무 많이 불러들이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였다. 앉아서 일하는 그들의 직업 때문에 학자들은 쉽사리 심한 우울증에 빠질 염려 가 있으니까 암울한 기분에 대처할 방도를 강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연구나 사색 없 이 사는 인생의 위험이나, 인생에 대한 성찰없이 사는 위험에 관해서도 다른 책을 쓸 수 있었을 것 이다. 농신의 기분은 그 어둠 때문에 위험할 수 있다. 그러나 영혼의 경륜에 대한 농신의 공헌 또 는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 만약 농신이 안겨주는 우울증이 방문하도록 허용한다면, 몸과 근육과 얼 굴에까지도 변화가 일어 나는 것을 느낄 터인데, 청춘의 열정이 주는 부담감이나 '참을 수 없는 존 재의 가벼움'으로부터 어떤 안도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우울증이라는 말이 내포하는 부정적인 개념을 없앨 수만 있다면, 아마 우리는 영혼의 경륜에 있어서 우울증의 역할이 어떤 것인 가를 잘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약, '우울'이라는 것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고 '그저 존재 의 한 형태'로서 영혼 제 좋은 때에 저 좋은 이유로 무엇인가 하는 것이라고 하면 어떨까? 단순히 "태양을 돌고 있는 항성 가운데 하나다"라고 생각하면 어떻겠는가?

우울증이란 임상적인 용어 대신에 전통적인 농신의 이미지를 쓰는 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울증이란 제게 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는 다양하게 존재의 한 가 지 방식으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인격미를 끌어내는 것이다. 마치 과일이 잘 익어가는 것처럼 한 사람 의 개성도 시간을 두고 나타난다. 나이를 먹는 슬픔은 개성적인 사람이 되는 일부이다. 우울한 생 각은 내면의 공간 속에 지혜가 머물 거처를 조각하여 마련하는 것이다.

농신은 전통적으로 납과 동일시 되었는데, 그 이유는 영혼에게 무게와 밀도를 더해 주어서 가벼 운 공기같은 요소들이 함께 뭉치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우울증은 생각과 감정이 값지게 응고되도록 돕는 과정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나이 를 먹으면서, 전에는 가볍고 산만하고 서로 연결이 안되던 생각들이 더욱 밀도있게 모여서 가치관 과 철학을 형성하게 되고 우리의 삶의 실체와 견고함을 안겨 주게 되는 것이다.

우울증이 안겨 주는 괴로운 공허감 때문에 우리는 종종 우울증으로부터 탈출구를 찾으려는 유혹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런 기분이나 생각 속으로 들어가면 깊이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우울 증은 우리에게 때때로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로 묘사되고, 붙들고 늘어질 것이 없는 것으로 여겨 진다. 그러나 우리가 시야를 넓혀서 본다면, 비록 부정적이기는 할 지라도 거기서 느끼는 공허함 이나 삶 속에서의 익숙한 이해심이나 구조같은 것을 상실하거나 열심히 사라진다든가 하는 모든 것이 삶에 새로운 상상력을 더해주는 방향으로 활용될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