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성서연구

햇순, 공동체성서연구


	9 / 2018	목차 (2018년 9월호, 제271호) :햇순:을 읽고.. / 편지로 띄우는 말씀 / 공동체성서연구자료 / 성서난해구 해설 오늘을 바라보며 / 말씀과 삶의 뜨락 / 손바닥 동화 / 강정규 동시 실험교실 / 성서연대 / 공동체소식

성서 난해구 해설

[새번역]에서 ‘예레미야의 말투에 교양이 없어 보입니다’

렘 20 :7a

민영진 목사

대한성서공회번역자문위원
세계성서공회연합회 번역자문위원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yjmin@bskorea.or.kr

민영진 목사님,
성경을 [새번역]으로 읽다가 황당한 경우를 만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쓸 말이 있고 써서는 안 될 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아무리 백성의 죄를 규탄하는 예언자의 어투라고 해도 그렇지요, 전직이 제사장이었다고 들었는데요, 교양이 부족할 것 같진 않고, 그런데도 어쩌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속이셔서” 자기는 “속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자기는 하나님에게 속아서 예언자가 되었다”고 말하다니요! 아래 번역 비교에서 보실 수 있듯이 제가 오랫동안 읽어온 [개역]이나 최근의 [개정]은 예레미야의 말투가 교양이 있어 보이고 경건한 면이 있어요.
[새번역] 렘 20:7
7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개역] [개정] 렘 20:7
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 勸諭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 勸諭를 받았사오며
그러면 그렇지요, 하나님이 어떻게 예레미야를 속였겠어요? 예언자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셨거나 되라고 권면하셨겠지요. 어쩌면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권하시니까 더는 거절 못하고 억지로 예언자가 되었을 수는 있지만 이것이 속이고 속는 관계는 아니지 않습니까?

“고운말(씁시다)” 올림

고운말 님,

좋은 의견 주시어서 고맙습니다. 실례를 무릅쓰고라도 미리 두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한 번역을 읽다가 내용이 좀 수상하다 하면 다른 번역을 비교해 보시는 것은 성경 독자로서는 참 세심한 태도라는 칭찬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예레미야가 예언자로 부름 받기 전에 아나돗의 제사장이었다는 견해를 아주 당연한 것처럼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말 번역 [개역]이나 [개정]이나 [새번역]은 이 점이 좀 모호합니다. 예레미야가 예언자로 부름받기 전에 제사장이었다는 말인지, 아니면 그의 아버지 힐기야가 제사장들 중 한 사람이었다는 말인지, 히브리어를 직역한 우리말 번역들은 뜻이 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어 번역들 중에 NET와 NIRV 1)는 고운말 님이 이해하신 대로 “예레미야가 제사장들 중 한 사람이었다”고 명확하게 번역해 주고 있습니다.

본론으로 돌아갈까요? 예레미야가 말버릇이 좀 고약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에게 영향을 받은 건지 아닌지는 몰라도 우리가 잘 아는 시인 중에 라이나 마리아 릴케의 “내가 죽는다면”이란 시 한 편 들어보실래요? 제가 좀 자유스럽게 번역한 것은 그의 말버릇을 제가 좀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내가 죽는다면, 당신 어쩌시렵니까? 나는 당신의 항아립니다 (그런데 내가 깨어진다면 요?) 나는 당신이 마시는 물입니다 (그런데 내가 시체가 되어 썩는다면 요?) 내가 당신의 입은 옷이고, 내가 바로 당신의 관절 關節인데, [그런 내가 죽고 나면] 당신은 살아있어도 송장이나 마찬가지지요. 내가 죽고 나면, 당신이 밖에 나갔다가 집으로 와도 가까이에서 따스한 말로 당신을 맞아 줄 사람도 없습니다 (내가 당신이 들어와서 사는 집이니까요). 당신의 피곤한 발에 신으실 비로드 샌들도 없을 것입니다. 내가 그 샌들이니까요. 당신이 늘 걸치고 다니는 큰 외투도 없어져 버리고 말 겁니다 (내가 당신의 외투니까요). 당신의 눈빛을 내 뺨이 늘 따스하게 맞아들이곤 했는데, 당신 머리, 베게로 고여 내 옆에 누이곤 했는데, 이젠 당신이 돌아와서 나를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이면 당신은 낯선 바위 위에 돌베개를 베고 누울 겁니다. 어쩌시렵니까, 하나님, (내가 죽고 난 다음, 당신이 혼자서 어떻게 살지 참) 걱정스럽습니다.”

좀 더 심하게 투정을 부린다면, “하나님, 나 죽으면 하나님만 외로우실 텐데, 어쩔 셈이세요? 나 죽어요? 살아요? 확 자살할까보다! 그러니까 하나님, 죽음으로 나를 위협하지 마세요!” 뭐,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시인의 이런 겁박 劫迫 같은 말이 신성모독 神聖冒瀆처럼 들리지 않고 하나님과 시인 사이의 친밀관계 親密關係가 부러울 정도로 귀여운 투정으로 들립니다. 하나님을 겁박한다는 것이 어디 가당키라도 한 말입니까? 하지만 이 시인이 하나님께 데드는 모습은 귀여운 구석이 있습니다. 자기가 죽고 나면 하나님이 얼마나 외롭고 아쉬울 것인지를 말하는 대목은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 天眞爛漫합니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말버릇은 구약에서는 욥이나 시편 시인들이나 예레미야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나 죽으면 하나님은 나 보고 싶어도 못보십니다 (욥)

21 어찌하여 나의 죄를
용서하시지 않으십니까?
죄악을 벗겨주시지 않으십니까?
나 이제 티끌 위에 누우면
당신께서 아무리 찾으신다 하여도
이미 없어졌을 것입니다
([새번역] 욥기 7:21)

나 살아 있을 때 내게 잘해주지 않으면 나 죽은 다음에 후회막급일 겁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사귐이 단절되면 하나님만 손해 아닌가?”라는 생각(시 88:10-14.)에서 하는 이런 식의 겁박도 있습니다.

10 당신은 죽은 자들에게 기적을 보이시렵니까?
혼백이 일어나서 당신을 찬양합니까? (셀라)
11 주님의 사랑을 무덤에서,
주님의 미쁘심을 저승에서 이야기하겠습니까?
12 어둠 속에서 당신의 기적들을 알아줍니까?
망각의 나라에서 당신의 정의가 드러나겠습니까?
13 야훼여, 내가 당신께 부르짖고 새벽부터 당신께 호소하건만
14 야훼여, 어찌하여 내 영혼을 뿌리치시고 이 몸을 외면하시옵니까?
(시 88:10-14)

우리 생각에는 고운말 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에게 할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는데, 예언자 예레미야도 릴케와 별로 다를 바가 없어요. 하나님을 주저함 없이, 당신의 예언자를 “속이는 자”로, 그래서 예언자는 속고 마는 자가 되는, 기만자 欺瞞者로 하나님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미 우리가 보았듯이 “ 7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새번역] 렘 20:7)라고 말합니다. 기존의 번역은 “ 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 勸諭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 勸諭를 받았사오며” ([개역], [개정] 렘 20:7)는 진짜 성경 같게 번역한 겁니다.

그런데, 이미 영어역 제네바 성경(GNV, 1599), 영어역 흠정역 성경(KJV, 1611), 영어역 두에이 림즈(DRA, 1899) 등이 히브리어 ‘핏티타니 아도나이 바에파트’를 “주님, 주께서 저를 속이셨으므로 제가 속았습니다. / Thou hast deceived me, O Lord, and I am deceived, DRA”라고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역]의 “여호와여 주 主께서 나를 권유 勸誘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 勸誘를 받았사오며”를 오역 誤譯이라거나 졸역 拙譯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히브리어 동사 PTH의 피엘형 동사의 뜻이 “속이다”라는 것을 우리말 번역자들이 몰라서 “권유하다”로 번역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개역]은 다른 곳에서는 같은 동사를 이미 “속이다”로 번역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삼하 3:25; 잠 24:28; 겔 14:9 등). 다만 렘 20:7에서만 PTH의 피엘형 동사가 “권유하다”로 번역된 것은 주어가 “여호와”이고 목적어가 “예레미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의 예언자를 “속인다”는 표현을 번역자가 기피한 것으로, 동양적, 한국적 완곡어법 婉曲語法이라고 볼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2)

제가 제 후배 성경번역자들에게는 성경 저자들의 성품과 개인적 어투와 문체를 넉넉히 연구하여 언문일치 言文一致의 번역을 하도록 늘 격려합니다. 경전 經典 문체 文體를 탈피할 것도 권면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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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ET Jeremiah 1:1 The following is a record of what Jeremiah son of Hilkiah prophesied. He was one of the priests who lived at Anathoth in the territory of the tribe of Benjamin.(Jer 1:1 New English Translation); NIRV Jeremiah 1:1 These are the words Jeremiah received from the LORD. He was the son of Hilkiah. Jeremiah was one of the priests at Anathoth. That's a town in the territory of Benjamin (Jer 1:1 New Internation Readers Version).
2) 1911년 [구역]이 같은 본문을 “여호와여 쥬끠셔 나를 명하심으로 내가 그 명령을 슌종하난대”라고 번역한 것도, 주어 하나님이 당신의 예언자에게 “속이다”라는 동사를 사용한 것을 기피한 완곡 번역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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