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목사님께,

별 걸 다 물으시네요. 우선 제가 여기 프놈펜에 있는 캄보디아 성서공회에 격월로 와서 한 주간씩 하고 있는 작업은, 벌써 2년째로 접어드네요, 크메르어 성경 ‘번역’이 아니고, 정확히 말해서 크메르어 옛 번역 성경 ‘개정’ 작업 컨설팅입니다. 새로운 번역을 하는 것이 아니고 1954년에 번역된 크메르어 옛 번역 성경(Khmer Old Version, 1954)을 개정하는 작업에 제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각설 却說하고.

오늘 오전에 개정 팀하고 뭘 했느냐고 물으셨지요? 출애굽기 33장 1-4절을 가지고 오전 내내 좀 시간을 많이 보냈어요. 크메르어 옛 번역의 내용은 대강 이렇습니다.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네가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이 백성을 이끌고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고 그들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그 땅으로 올라가거라.

2 내가 한 천사를 보낼 터이니, 그가 너를 인도할 것이다. 나는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겠다.

3 너희는 이제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이므로, 내가 너희와 함께 가다가는 너희를 진멸해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4 백성은 이 나쁜 소식을 듣고 슬퍼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몸에 걸치고 있던 장식품을 다 떼내었다. (출 33:1-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신 말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셨다가는 언제 또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직접 공격하시어 그들을 대량으로 학살하실지 모르니까 그 학살을 막기 위해서라도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시는 것을 자제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나쁜 소식’입니까?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애틋한 사랑과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시려는 세심한 배려가 이 말씀 안에 들어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크메르어 옛 번역은 여기에서 ‘이 나쁜 소식’(dam- noeng ah-krok nuh/ ‘these evil tidings’)이라고 번역했을까요? 히브리어 원문에도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haDDabar hara` hazze/ ‘these evil words’)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러니까 [미국표준역](Ameri- can Standard Version, 1901)을 포함한 영어 번역들도 히브리어 원문을 그대로 문자대로 번역하여 ‘이 나쁜 소식 these evil tidings’이라고 번역했고, 크메르어 옛 번역도 이 영어 번역을 그대로 따라 번역하였습니다. 중국어 번역들은 ‘흉신 凶信’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흉악 凶惡한 소식 消息’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번 개정 팀에서 이 본문을 전혀 개정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어요. 크메르어 옛 번역 이후에 새로 번역된 다른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성경을 보게 했지요. 결국, ‘이 참담 慘憺한 말씀’으로 개정하겠다고 하더군요. [영어새개역](NRS, 1989)의 ‘these harsh words’와 [영어표준역](ESV, 2001/2011)의 ‘this disastrous word’를 따라서 그렇게 개정하겠다는 것입니다. 퍽 발전한 생각이었기 때문에 더 논의할 필요가 없었지요. 칭찬해주었어요. 이렇게 문제점을 지적해주고, 현지 개정 팀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컨설턴트가 하는 중요한 일 중에 하나입니다.

나로서는 우리말 [개역](1938/1952/1963)이 이 본문을 어떻게 번역하였는지 보았습니다. 놀랐습니다. 그리고 우리말 옛 번역자들이 세계적으로 크게 공헌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된 본문만 보실까요?

3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4 백성이 이 황송 惶悚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 丹粧하지 아니하니

‘이 황송한 말씀 regretable but grateful words’은 히브리어 본문을 글자그대로 반영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고집 센 백성이어서 하나님께) 죄송하고, 그러나 (심판을 보류하시니 하나님께) 고마운’ 그런 마음을 우리 번역자가 그 번역에서 참 잘 담아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이런 경우를 두고,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고도 하는 것 같습니다.

민영진